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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대조선(大朝鮮)'의 돈 찍어내던 조폐창 터

2001-05-19 1998년 4월호
지금의 인천여고 자리는 구한말의 돈을 찍어내던 전환국(典 局) 터였다. 전환국(典 局)은 요즘으로 말하면 조폐공사다. 우리나라는 개화이전에 상평통보라는 엽전을 사용했는데 너무 무거워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비로소 전환국이 설치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서양식 화폐가 사용됐다.
원래 전환국 조폐창은 1886년에 서울의 남대문밖에 설립됐다. 이듬해부터 주화의 원료인 동(銅)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기계는 독일에서 들여오고 독일사람을 초빙하여 신식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설도 빈약하고 기술자도 없어 조폐창이 제 구실을 못하자 직원들을 일본에 보내 돈 찍어내는 기술을 배우게 했다.

전환국이 인천에 옮겨 온 것은 1892년(고종 29년)이었다.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이라 주화 제조에 필요한 동(銅)을 서울까지 수송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정부는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새로운 조폐공장을 물색했다.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제물포가 우선 순위에 올랐다. 화도진 부근의 현 인천여고 자리에 새로운 조폐창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돈을 찍어내는 동네라 하여 해방 후에 동(洞)이름도 전동(錢洞)으로 바뀌게 된다.
1892년 5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준공한 조폐창은 약 6만원의 비용을 들여 1,550평 대지 위에 凹자 형태의 벽돌건물 3동으로 세워졌다. 중앙에는 평량실(枰量室)과 사무실겸 화폐조사실, 동측에는 기관실, 서측에는 조각실과 창고 그리고 감사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건물은 한국정부 최초의 양식건축이라는데서 건축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서울에서 인쇄시설을 이전하는데 큰 불편이 뒤따랐다. 그 당시 경인간의 화물운송은 주로 한강을 이용했다. 기계들을 한강까지 끌고 와 배에 싣고 강화수로를 통과해서 송현동 해안에 배를 대고 하역했다. 너무 무거워서 개펄에 빠지는 등 큰 어려움을 겪은 끝에 돈 찍는 기계는 겨우 새집으로 이사했다.
인천전환국 조폐창은 9대의 압인기로 5냥짜리 은화, 1냥짜리 은화, 2전5분짜리 백동전, 5분짜리 동전, 1분짜리 황동전 등 5종류의 주화를 찍어냈다. 화폐발행량은 확실치 않으나 최초로 발행한 5냥 은화는 총 19,923냥을 발행한 것으로 기록됐다.
처음에 이들 주화에는 국명을 대조선(大朝鮮)이라고 새겨 놓았는데 이를 두고 청나라의 원세개가 시비를 걸어왔다. 불행하게도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1893년부터 1895년 사이에 발행한 주화에는 대조선의 '大'자를 빼고 그냥 '조선'이라고만 새겨 넣는 굴욕을 맛보았다.
그러던 중 고종의 명령으로 1900년 5월 용산에 새로운 전환국이 세워졌다. 마침 1899년 9월에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원료수송이 쉬워지자 전환국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1900년 7월, 8년전 배에 실려 인천에 왔던 기계들은 화물기차에 실려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전환국이 떠난 그 자리는 1904년 러 일전쟁 때 일본군이 잠시 주둔했고 또한 철도감부(鐵道監部)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후 1908년 인천여고가 설립되며 교사(校舍)로 사용되다가 잇단 화재로 부분적으로 소실됐고 새로운 교사가 세워지면서 아쉽게도 완전히 철거됐다.
최근 인천여고는 연수동 이전을 확정했다. 100여년 전 '대조선'의 돈을 찍어내던 전환국터는 이제 또 그 자리에서 어떤 '역사'를 찍어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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