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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물 별명은 소금의 고장 명성에서 유래
'짠물'하면 인천을 상징한다. 지금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불려지지만 인천이 '짠물'이란 별명을 듣게 된데는 염전이 한몫을 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소금생산의 최적지로 선택받은 땅이었다.
1907년 전국 최초로 근대식 천일염전이 생겼다. 조선조 말기에 통감부의 일본인 기사 나까오꾸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조선정부는 1907년에 지금의 5, 6공단 자리인 주안의 간사지(干瀉地) 1정보(町步)를 택해서 시험 천일염전을 축조했다. 시험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청국이나 일본에서 생산되고 있던 1등품 소금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지형, 지질, 기후 등이 양질의 소금을 생산하는데 적합했다.
천일제염은 발로 젓는 물레방아를 이용해 바닷물을 수차례 염전에 끌어올려 여러 단계의 넓은 염전으로 흘려보내 동안 햇빛을 받아 수증기는 계속 증발하고 넓은 사금파리 염판에 소금이 가라앉게 되면 이를 긁어 모으면 된다. 그때 주안염전에서는 1정보 당 연 12만근의 소금이 생산되었다.
이후 주안염전은 이듬해까지 212정보로 확장되었고 21년에 남동염전 300정보, 25년에 군자염전 575정보가 증설되었다. 32년에는 총면적이 1천115정보에 달했고 전국 생산량의 절반인 15만톤을 생산할 만큼 '짠물'의 명성을 다져나갔다.
이렇게 염전이 계속 늘어나면서 담배와 함께 소금이 국가의 전매국이 되었고 인천 주안에는 전매국 직속인 전매지국이 생겼다. 1930년경에는 경기도 전매국 인천출장소로 되면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의 많은 염전까지 관리하는 소금업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천은 근대식 천일염전이 생기 전에도 이미 소금을 생산했다. 지금으로부터 약100 전 서곶지역에는 '염벗'이라고 불리는 소금굽는 곳이 많이 있었다. 가까운 섬에서 굴깍지를 실어다 백회(白灰)와 반죽해서 만든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고 나무를 때면서 졸였다.
이 시절에는 소금이 귀했기 때문에 염벗업자들의 주머니 사정도 아주 좋았다. 이런 관계로 서곶해안에 80여명의 염벗업자들이 활동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문헌을 보면 '인천에서는 어세(漁稅)보다 염세(鹽稅)가 더 많이 걷혔다'는 기록이 있다. 어세는 109냥 5전인데 비해 염세는 196냥 3전이었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각종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어쩔수없이 소금의 부족도 뒤따랐는데 당시 소금값은 쌀값과 맘먹을 정도였다. 정부에서는 소금공급을 늘리기 위해 관영염전 외에 민영염전을 허가했다. 특히 52년에는 소금 증산 5개년 계획을 세워 염전축조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주안 뿐만 아니라 군자, 백석, 십정동 등 인천은 온통 '소금밭' 투성이었다.
그러나 60년대 말의 도시확장과 산업시설 설립 등으로 우리나라 천일염전의 효시였던 주안염전이 폐전(廢田)된 것을 시작으로 80년대에 남동염전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다. 현재 염전이 있던 소금밭은 점차 주거지역과 공단지역으로 변해가면서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말그대로 '염전벽해(鹽田碧海)'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