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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큰사랑으로 인천 치료한 '제물포 슈바이처'

2001-05-23 1998년 11월호

약대이산은 자유공원 홍예문 위를 지나면서부터 신포동 거리까지로, 지금의 성공회 성당 주변일대를 일컬었다. 약대이산은 약대인(藥大人)산에서 와전된 것이다.그 산이 당시 인천인들의 마음 속에 거봉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랜디스(한국명 남득시 南得時)라는 한 미국인 청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랜디스를 '약대인'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병원을 '약대인병원'이라고 불렀다. 인천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은 의사로서 헌신적으로 주민들을 치료한 그를 마음 속 깊이 존경했기 때문이다.

닥터 랜디스는 1890년 9월 29일, 한국성공회 초대 주교 고르페(한국명 고요한 高耀翰)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인천에 온 고르페 주교와 선교사들은 중구 송학동에 한국최초의 성공회교회인 성 미가엘교회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 교회가 궤도에 오르자 주교와 선교사들은 서울로 들어갔다.

그러나 랜디스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인천에 남았다. 그는 이듬해 10월, 교회 이웃에 진찰실과 입원실을 갖춘 병원을 개설했다. 그것이 바로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성(聖) 누가(Luke)병원'이다.

그때까지 인천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치료의 손길없이 그냥 죽어가거나 한방으로 겨우 치료할 뿐이었다. 물론 1883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내에 현대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었으나 일본인들만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닥터 랜디스는 뛰어난 의술과 따뜻한 인간애로 병으로 신음하던 많은 인천사람들을 위해 불철주야 진료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환자를 혼자 감당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안타깝게도 1898년에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어서도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현재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 양지 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랜디스(1865년~1898년)는 미국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시에서 태어나 펜실바니아의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랭카스터 공립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그후 당시 영국해군 종군신부였던 고르페 신부를 만나 인천과 인연을 맺게된 것이다.

닥터 랜디스는 의료활동 뿐만 아니라 교육사업에도 열정적이었다. 1891년에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를 개설, 40명의 학생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켰다. 낮에는 환자를 돌보고 밤에는 학생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부모를 잃은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보살피는 일을 시작, 인천 고아원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닥터 랜디스가 떠나고 난 후 성 누가병원은 일시 폐쇄되었다가 1902년 약 6개월간 러시아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영국인 의사 메이어가 부임했는데 마침 인천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이 벌어졌다. 그때 전투 중 러시아함정이 자폭, 수많은 부상병들이 발생해서 급히 성 누가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이후 1906년까지 근근히 병원의 기능을 하다가 닥터 메이어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결국 병원의 문은 굳게 닫혔다.

병원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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