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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굿인이 만난 사람

2024-11-04 2024년 8월호

역사는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굿인이 만난 사람 - 8.15 광복절 특집


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  ㅣ 사진 최준근 포토디렉터 


- 우리나라 의병 연구의 대가

- 5년 동안 5,000명 넘는 독립유공자 발굴

- 송도고 진짜 설립자 찾아내기도




이태룡 소장

-경상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현)

-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현)

-전해산기념관설립위원회 자문위원장(역임)

-신암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역임)

-국가보훈부 공적검증위원회 위원(역임)

-논문 ‘최익현의 순창의병과 유소 연구’ 등 30여 편

저서 <한국의병사>(상·하) 등 단행본 45권

-2011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 ‘올해의 국제 교육자 100인’ 선정

미국 인명정보기관(ABI) ‘21세기 위대한 지성’ 선정 등 

4차례 세계 인명사전 등재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사실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매년 적게는 300명 안팎, 많을 때는 600명가량이다. 이들은 국가보훈부의 검증과 심사를 거쳐 독립유공자로 선정된다. 그런데 심사에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 인천의 한 대학 부설연구소 때문이다. 이 연구소는 한 해 평균 1,000명에 육박하는 독립유공자를 새로 발굴해 포상 신청을 한다. 정부의 심사 역량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심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현재 국가보훈부에서는 이 연구소가 2019년, 2020년에 신청한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심사가 진행 중이다. 2021년 이후 신청자는 아예 심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 연구소가 국립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다. 국내 대학 중 유일한 독립운동사연구소다. 연구소 설립 이후 이름과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들이 속속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 발굴 역사는 이 연구소의 설립 전과 후로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일이 아니라 반일입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인천대 미추홀캠퍼스 별관 4층 독립운동사연구소를 찾았을 때 이태룡 소장은 ‘일제에 맞서 싸운 행위’에 대한 정의부터 바로잡았다.

“‘항일’은 이미 (일본에) 지고 들어가는 용어입니다. 버틴다는 피동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죠. 반면 반일은 일본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능동적인 성격이 강하죠. 일제가 통감부나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고 하자 이에 반대해 의병이 일어난 겁니다.”

학자로서의 식견과 소신을 바탕으로 한 거침 없는 역사관만큼, 그의 행적 또한 어렸을 때부터 거침이 없었다.


그는 고교 시절 우리나라의 전통 운율이 7.5조라고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반기(?)를 들었다. “향가도, 시조도 7.5조가 아닌데 어떻게 우리의 전통 운율이 7.5조가 되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다. 선생님은 교과서에 나온 것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훗날 국어 교사가 된 그는 일본 시가의 영향으로 왜곡된 전통 운율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 교과서 수정을 이끌어냈다.


이태룡 박사가 전국 주요 의병장들의 행적을 집대성해 2022년 발간한 ‘일제 침략기 73인의 기록’


“제가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보람된 일을 꼽으라면 전통 운율의 오류, 그리고 독립운동가 최익현의 사망 원인이 아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 교과서를 바로잡은 일입니다. 또 하나는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것이에요.”


경남 고성이 고향인 그가 인천에 온 것은 2019년이다. 당시 인천대 총장이었던 조동성 박사와 최용규 당시 인천대 이사장의 제의로 ‘독립운동사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인천에 발을 디뎠다. 2020년 3월 설립된 연구소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올 2월까지 모두 11차례에 걸쳐 총 4,685명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발굴, 포상을 신청했다. 이 중 포상을 받은 이는 440명. 현재 연구소에선 전영복·이윤옥·신혜란·임동환 연구원이 함께 독립유공자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포상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처참했던 독립운동가와 가족의 삶이 드러나기도 했다.

“남편의 독립운동으로 일본 군경에게 모진 압박을 받던 미망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운구된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상여가 집 앞 개울을 건너자 극약을 먹고 자결했어요. 이 바람에 남편의 상여는 되돌아왔고 쌍상여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전해산 의병장의 부인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연구소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윤치호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송도고의 진짜 설립자가 미국인 목사 ‘와슨’(W.A Wasson)이란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연구소는 새로 발굴한 350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해 8월 중으로 12차 포상 신청을 할 계획이다. 이로써 연구소가 지금까지 발굴한 독립유공자는 5,000명을 넘게 된다. 어찌 보면 이 소장은 독립유공자 발굴에 평생을 바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경상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교직에 몸담으면서 대학원에서 ‘의병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의병문학을 연구하면서 의병장이나 의병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많은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다.

가족사는 비극 그 자체다. 당숙이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했고 큰할아버지는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4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큰할머니와 할머니 또한 일제 앞잡이들에 의해 세상을 등져야 했다. 의병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집안 내력이다. 전공으로 의병문학을 선택한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소장은 “역사라는 것 자체가 그 민족, 그 겨레의 뿌리를 찾는 일”이라며 “퇴임 후에는 저술활동을 통해 뿌리를 찾는 일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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