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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인천이야기 | 고소한 밀담(밀談) ④

2026-07-31 2026년 8월호

‘밀가룩’ 패션에서 ‘힙’한 패딩까지


이제 밀가루 포대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다. 그 포대는 단지 양식을 담는 자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때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실용적인 ‘패션 원단’이었다. 단순히 가난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생존의 지혜였고 재활용의 철학이었다. 평범한 밀가루 포대 한 장이 시대를 입고 문화를 만들며 땀이 배어 있는 삶의 기록이 되었다. 


글. 유동현 (前 인천시립박물관장)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의 ‘Flour Sack Clothes’ (출처: 위키피디아)


1972년 3월 20일 『동아일보』에서 해외토픽으로 다룬 밀가루 포대 비키니 


밀가루 포대로 만든 해녀 잠수복


미제(美製) 밀가루 포대 옷의 시작

밀가루 포대 옷의 역사는 100년이 훌쩍 넘는다. 190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인 이민 노동자, 이른바 ‘쿨리(Coolie)’들은 튼튼한 면직물로 만들어진 밀가루 포대를 바지나 작업복으로 만들어 입었다. 당시 포대는 값싼 면직물이었지만 질기고 내구성이 뛰어나 의류용 천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1930년대 미국을 덮친 대공황은 밀가루 포대를 패션의 중심에 서게 했다. 새 옷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던 농가와 빈곤층은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고, 헌 옷을 여러 번 고쳐 입어야만 했다. 원단마저 귀해지자 주부들은 자연스럽게 밀가루 포대에 눈을 돌렸다.

처음에는 자루에 머리와 양팔이 나올 구멍만 뚫어 아이들에게 그대로 입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앞치마와 원피스, 셔츠, 유아용 옷까지 다양한 의류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이러한 옷을 ‘Flour Sack Clothes’​라고 불렀다.

처음의 밀가루 포대는 흰 천에 회사 로고와 브랜드명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주부들은 잉크를 지우느라 적잖은 애를 먹었다. 그러자 제분회사들은 이 변화를 눈여겨보고 마케팅 기회로 활용했다. 회사 로고는 눈에 띄지 않게 작게 넣고, 대신 포대 전체에 아름다운 무늬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꽃무늬는 물론 동물 그림, 기하학 문양 등 다양한 디자인이 등장했다. 유명 디자이너가 도안을 맡은 한정판 포대까지 출시됐다.

“밀가루 한 포 주세요. 저기 빨간 꽃무늬 포대로요.”

밀가루를 살 때도 기준이 달라졌다. 브랜드보다 포대의 디자인을 보고 제품을 고르게 되었다. 어떤 회사는 물에 쉽게 씻겨 나가는 특수 잉크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아예 종이 라벨만 붙여 소비자가 손쉽게 떼어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밀가루 포대의 변신은 의류에만 그치지 않았다. 가방과 침대보, 식탁보, 커튼, 수건은 물론 기저귀까지 만들어 사용했다. 수명이 다하면 행주와 걸레로까지 쓰였다. 오늘날 ‘업사이클링’이나 ‘제로웨이스트’가 유행하기 훨씬 전, 사람들은 이미 생활 속에서 완벽한 순환경제를 실천했던 셈이다. 


해외 토픽, 칠레의 밀가루 포대 비키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밀가루 포대의 전성기는 더 이어졌다. 군복, 천막, 더플백 등의 생산 때문에 섬유가 군수공장에 우선 공급되면서 일반 시민들은 원단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미국 정부는 포대를 재활용해 옷을 만드는 일을 애국적인 실천으로 적극 권장했다. 당시 미국 곳곳에서는 ‘자루 옷 만들기 대회’가 열렸고, 여성들은 재봉 솜씨와 디자인 감각을 겨루며 새로운 패션 문화를 만들어 갔다. 밀가루 포대가 이른바 ‘밀가룩(Look) 패션’이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종이 포대가 면직물 자루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밀가룩’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더 이상 포대를 옷감으로 사용할 이유도 없어졌다.

하지만 밀가루 포대 패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등장했다. 1972년 남미 칠레에서는 미국산 밀가루 포대로 만든 비키니와 숏팬츠가 젊은 층 사이에서 큰 유행을 일으켰다. 해수욕장은 물론 수도 산티아고 거리에서도 미국 밀가루 포대로 만든 의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포대에 인쇄된 ‘Gift of the American People(미국 국민의 기증)’, ‘Do Not Use Hooks(갈고리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같은 영어 문구조차 독특한 디자인 요소로 받아들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유행이 물자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칠레 젊은이들에게 미국 밀가루 포대는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동시에 당시 사회주의 정권의 반미 정책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었다. 


70년대 고교 졸업식 뒤풀이 (사진: 박근원) 


60년대 미국 원조 밀가루를 하역하는 인천항 


처절했던 한국의 밀가루 포대 이야기 

우리나라의 밀가루 포대 이야기는 미국이나 칠레보다 더 절실하고 처절했다. 6·25전쟁 이후 한국은 식량도 부족했지만 옷감은 더 귀했다.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PL480’을 통해 대량의 밀가루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다. 대부분 질긴 면직물 포대에 담겼다. 사람들은 밀가루를 다 털어낸 뒤 가마솥에 포대를 삶은 후 옷감으로 사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가 인쇄된 포대를 검은색으로 물들여 교복을 만들어 입었다. 이 장면은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소년 챔프』에 연재된 만화 『검정고무신』(그림 이우영·글 이영일)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기철이는 밀가루 포대로 교복을 만들었다가 등에 희미하게 남은 ‘거북표 밀가루’ 상표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다.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밀가루와 교복은 의외로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이른바 ‘밀가루 교복’이다. 1960~70년대 고등학교 졸업식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운동장을 하얗게 뒤덮던 밀가루를 떠올릴 것이다. 졸업생들은 서로의 교복에 밀가루를 뿌리고 교복을 찢고 무당 굿하듯 오색 테이프를 몸에 감았다. 당시에는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여겼다.

왜 하필 밀가루였을까. 교복 색깔 때문이다. 당시 교복은 검은색이어서 가장 눈에 띄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재료가 바로 밀가루였다. 여기에 역사적 상징성을 더하는 해석도 있다. 일제강점기 학생들은 검은색 제복을 강제로 입고 두발 규제까지 받아야 했다. 졸업과 함께 검은 교복을 찢고,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흰색을 온몸에 뒤집어쓰는 행위는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와 해방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날이 갈수록 졸업식 뒤풀이가 점차 과격해지자 사회문제로 번졌다. 법무부와 교육청, 경찰이 합동 단속에 나섰고, 졸업식 당일이면 학교 주변에 경찰관들과 교사들이  순찰을 도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1960~70년대의 ‘밀가루 졸업식’은 외신에 소개될 만큼 요란한 한국만의 졸업 문화로 알려졌다.

1979년 1월 18일 자 『조선일보』에 당시 분위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강당에서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자 교내 확성기에서는 안내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교복을 찢거나 밀가루를 던지는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맙시다.”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동장 한쪽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이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밀가루 봉지가 터졌다. 순식간에 하얀 밀가루가 공중으로 흩날렸고, 운동장은 졸업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학생들의 함성과 웃음으로 가득 찼다.

먹거리를 담던 밀가루 포대는 전쟁 직후에는 옷이 되었고 산업화 시대에는 졸업식의 추억이 되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평범한 식재료가 사람들의 삶과 문화 속에서는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 책가방도 귀했다. 책가방 대신 밀가루 포대를 잘라 만든 책보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가끔은 밀가루 포대로 팬티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불시에 시행된 용의 검사로 인해 ‘빤즈’의 정체가 들통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밀가루 포대로 이불 홑청을 만들어 덮어야 하는 빈한한 삶도 있었다. 그 시절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문양이 함께 도안되어 있는 포대를 덮으며 잠을 청했던 이들은 아메리칸 꿈을 꾸었을까. 어머니가 밀가루 포대를 재단해 만들어 준 태권도 도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비록 볼품없는 밀가루 포대 도복이었지만 그 도복을 입으면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밀가루 포대는 바다에서도 쓰였다. 1963년 8월 19일 자 『동아일보』에는 밀가루 포대로 만든 잠수복을 입은 해녀들의 모습이 소개됐다. 변변한 장비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포대는 생계를 위한 작업복이기도 했다.


인천 제물포구 북성동에 있는 대한제분 공장


2021년 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곰표 패딩 등 컬래버 제품들


거리를 활보한 ‘곰표’ 밀가루 포대

2018년, 거리에 ‘백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밀가루 포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패션의 주인공이 됐다. 이번에는 생계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힙한 감성’의 상징이었다. 흰 바탕에 투박한 초록색 글씨, 단순한 곰 캐릭터. 오래된 밀가루 포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디자인의 ‘곰표 티셔츠’가 출시되었다. MZ세대는 “촌스러운데 귀엽다”, “레트로 감성이 살아 있다”며 열광했다. 백곰처럼 두툼한 ‘곰표 패딩’까지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곰표의 주인공인 대한제분은 1952년 인천에서 출발한 밀가루 전문 기업이다. 자칫 추억 속 상표로 남을 수도 있었던 곰표는 컬래버레이션 마케팅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브랜드로 다시 태어났다. 티셔츠와 패딩을 넘어 맥주, 팝콘, 나초, 핸드크림, 치약 등 다양한 제품으로 확장되며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50~60년대에는 입을 옷이 없어 포대를 뜯어 옷을 지어 입었다면, 2018년 이후에는 그 포대의 디자인을 입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궁핍의 상징이었던 밀가루 포대는 세월을 건너 레트로 패션의 아이콘으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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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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