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미소
IncheON 사람과 도시
검은 대지에서
푸른 하늘까지
포토저널리스트 김성환, 인천의 시간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매립 전 송도, 1997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갯벌이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1977년 11월, 강원도 태백 장성광업소.
아버지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탄가루를 시꺼멓게 뒤집어쓴 채 의식을 잃은
탄부들이 병원 마당에 놓여 있었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달려갔다.
울부짖으며 병원 담을 넘었다.
아들도 뒤를 따라 뛰었다.
그때, 열두 살이었다.
그로부터 꼭 스무 해가 지난 1997년.
아들은 초경량항공기에 몸을 싣고
인천의 하늘 위로 올랐다.
아래로 끝없는 갯벌이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 도시의 미래가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수 킬로미터 땅속으로 내려갔다.
아들은 사진기 하나 들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 사이의 거리만큼, 인천이 있었다.

위. 탄광 입사 후 기념 촬영.
땅속으로 내려가기 전, 그들은 웃었다.

아래. 나의 아버지, 김필호. 1986년.
아들이 사진기로 가장 먼저 담은 얼굴.
검은 세상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들의 옷과 얼굴은 온통 검었다.
그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보였다.
겨울에 눈이 쌓여도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엔 흰색, 이내 회색, 끝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미술 시간에 개천을 검게 칠했다.
1977년 11월 16일.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화재가 났다.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218명이 유독가스 중독으로 쓰러졌다.
아버지 김필호는 최초 구조대로 갱 안으로 투입됐다.
마스크 하나에 의존한 채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의식을 잃은 채로 실려 나왔다

송도 1·2·3공구 매립현장, 2002년 6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미래가 현실이 됐다.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시흥 오이도에서 본 송도, 2008년.
아들이 날았던 하늘 아래, 도시가 솟아올랐다.
아버지는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2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가족은 목숨값으로 받은 보상금을 쥐고
서울로 이주했다.
아들은 대학에 들어간 뒤,
방학마다 건축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50만 원이 모였다.
삼성 미놀타 XD5.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사진기가 처음으로 손에 들어왔다.
‘찰칵.’ 가장 먼저 찍은 건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눈물이 많았다.
말은 없었지만, 가족에게 늘 미안해 하셨다.
“나이 드신 분들의 얼굴을 사진에 담을 때마다
아버지가 보입니다.”
탄가루가 박혀 생긴 상처.
깊게 패인 주름.
그 얼굴이 말없이 렌즈 속으로 들어왔다.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건설현장, 1997년.
땀과 소음이 뒤섞이던 그 자리, 그가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갯벌 위의 미래
1997년, 구 송도.
초경량항공기 비행장을 찾아가 비행에 올랐다.
탑승석에는 덮개가 없었다. 인터컴도 작동하지 않았다.
조종사와는 눈빛으로 소통해야 했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건 갯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메워질 것 같지 않은 땅 위에서
트럭과 포크레인이 더디게, 더디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조감도 하나가 서 있었다.
‘송도정보화신도시.’
실현될 수 없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셔터를 눌렀다.
인천 사진가 최초의 송도 매립지 항공촬영이었다.
그 꿈은 십 년도 채 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아버지는 수 킬로미터 지하 막장으로 내려갔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내놓고 탄을 캤다.
아들은 하늘 위로 올라가 셔터를 눌렀다.
“아버지나 저나, 자신의 자리에서 온 힘을 다했다는 것.
그 순간만큼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결국 하나, 가족이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현장, 1997년.
갯벌 위 새 역사가 시작되던 시간.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그가 거기 있었다
1997년, 인천국제공항 건설 현장.
먼지와 흙내가 코를 찔렀다.
콘크리트 타설 냄새가 섞여 들었다.
‘쿵.’ 쇠기둥이 박힌다.
얼마나 많이 박아 넣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드릴이 콘크리트를 파고든다.
헬멧을 눌러쓴 얼굴에 땀이 흐른다.
김성환은 그 사이에 서서 사진기를 들었다.
공항이 세워졌다. 항만이 확장되고, 철로가 놓였다.
도시는 그렇게 거대해져 갔다.
2000년,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했다.
너무도 기뻐 곧바로 동남아로 가는 저렴한 티켓을 샀다.
멀어지는 공항을 오래 바라보다가 렌즈를 맞췄다.
2002년 한일 월드컵,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그 모든 현장에 그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카메라를 내려놓는 순간,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그때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새로운 촬영이 잡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이 설레고 기다려진다.
“천직인가 봐요.”

동인천 양키시장의 마지막 상인 이춘화.
불이 꺼져도 그 자리를 지켰다.
사라지기 전에
인천을 찍기 위해 삼십여 년을 살았다.
슬라이드 원본 필름 45,151컷, 바인더 139권.
사진 한 컷 한 컷의 촬영지, 내용,
일자를 확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인천시립박물관으로 떠나보냈다.
“나의 반평생을 싣고 떠났습니다. 한순간이었어요.
그 허전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디스크, 어깨와 무릎 관절 파열.
사진기를 들기 버거울 만큼 몸이 닳고 망가졌다.
“그래도 아버지가 겪으셨을 그 어둡고 외로운 막장 인생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십정동 열우물마을, 2009년 9월.
아이들이 달리던 골목. 지금은 사라진 마을의 마지막 봄.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갯벌이 사라졌다.
공장이 사라졌다.
탄광촌도 사라졌다.
그 자리마다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다.
남은 건 사람들의 흔적이다.
골목을 가르며 달리던 아이의 숨.
끝내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노인의 뒷모습.
동인천 양키시장. 불이 하나둘 꺼진다.
텅 빈 가게, 먼지 쌓이는 물건, 잦아드는 발걸음.
그 사이로 김성환이 다가섰다.
오랜 시간 비워진 낡은 건물.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한 줄기 햇살이 비껴든다.
‘찰칵.’
아버지는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내려갔다.
아들은 빛을 찾아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 사라져가는 빛 앞에 서 있다.
한 사람이 셔터를 누른다.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1997년, 『굿모닝인천』과 함께 인천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삼십여 년간 개발과 소멸, 축제와 일상을 렌즈에 담았다. 슬라이드 원본 필름 45,151컷, 바인더 139권. 그 기록은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됐다. 건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문화콘텐츠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우리미술관 개관 특별전시 초청작가로 참여했으며, 인천도시역사관 『도시를 보는 10명의 초청 작가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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