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미소
인천에서 인천으로_ 배다리, 기억의 곳간을 열다
아직, 배다리
남기지 못한 것과 남아 있는 것
배다리 사람들이 오래된 것들을 꺼냈다.
마을 전시를 앞두고,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벽에 걸린 목련화 한 점.
시집오던 날, 손수 수놓아 간직해 온 것이었다.
날이 닳은 가위. 서랍 깊숙이 잠들어 있었다. 열여섯에 처음 손에 쥔 가위였다.
장롱 속에 고이 접혀 있던 망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한 코 한 코 엮어 둔 것이었다.
낡은 괘종시계가 ‘댕─’ 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골목을 건너갔다.
잊힌 줄 알았던 것들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배다리. 봄빛이 낮게 번졌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에이이미지 스튜디오

강철이 두드린 쇠

박태순의 손

조순자가 엮은 시간

최창훈이 피운 꽃
쇠로 남기다
‘탕─, 탕─’
망치가 쇠판을 두드렸다. 한 번, 또 한 번. 붉은 우체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를 받지 않는 우체통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편지를 쓴다. 강철이 만들었다.
강철. 아버지가 불 속에서도 버티라고, 더 단단해지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강원도 속초 태생, 아버지도 철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 손을 보고 자라, 스물여섯에 인천으로 왔다. 주안공단에서 자동차 부품을 만들고, 산업 플랜트를 조립했다. 막 입사한 청년들을 기술자로 길러냈다.
쇠가 불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를 때의 열기, 망치가 내려앉을 때 손바닥을 타고 오는 진동, 담금질할 때 코끝을 찌르는 쇳내를 몸으로 익혔다. 망치질하고 그라인더를 갈고 도면을 그리던 손. 그 손이 지금은 붓을 쥔다.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그리지 않아요. 공장이든 골목이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까요. 사람들이 거기서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는지를.”

화평동 작업실에 강철이 서 있다.
평생 쇠를 만지며 살아온 사람이다.

강철 작가.
자화상 속 얼굴이 골목을 바라본다.

화평동 작업실 한켠,
붉은 우체통이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2016년 봄, 배다리로 왔다. 헌책방을 드나들던 시절부터 익숙한 골목이었다. 이사 오던 해, 동인천 우체국이 문을 닫았다. 한 세기 가까이 골목을 지켜온 자리였다. 어린 시절 부터 기념우표를 사고 편지를 부치던 곳. 그 자리가 하루아침에 텅 비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더라고요. 그냥 둘 수가 없었어요.” 쇳가루 자욱한 작업실에서 그는 철을 두드렸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우체통을 꺼냈다.
2024년, 그 우체통을 인천 아트플랫폼 전시장에 놓았다. 외갓집으로 가던 길을 떠올리고, 평생 밟아보지 못한 고향 땅을 그리며, 먼저 떠난 사람에게 끝내 부치지 못한 말을 종이에 꾹꾹 눌러 담았다. ‘스르륵─’ 편지가 우체통 안으로 미끄러졌다. 저마다의 사연이 그렇게 쌓였다.
“다들 뭔가 응어리진 게 있잖아요.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말로는 못 하는 것들이.”
올봄, 그 우체통은 배다리 마을 주민 전시장에 다시 선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 사십 년째다. 사라져 가는 골목을 그린다. 재개발 바람이 불고 아파트가 올라서도, 그의 화폭 안에서는 골목이 남는다. 날짜를 쓰고 이름을 적는다. 강철.
“나중에 누가 봐줄지는 몰라요. 하지만 지금 안 그리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 골목이 있었다는 걸.”
화평동 작업실, 붉은 우체통이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누군가 조심스레 종이를 꺼낸다. 망설이다 한 줄을 꾹 눌러쓴다. 종이 스치는 소리가 골목 안으로 스며든다.

오십 년째, 멈추지 않은 손.

박 의상실 박태순 대표.
뒤뜰 동백에 꽃몽우리가 맺혔다며, 그가 웃는다.
사각사각, 오십 년
날이 다 닳았다. 갈아도 천이 잘리지 않는다. 그래도 손에서 놓지 못한다. 1977년
배다리에 의상실을 차리던 날 처음 손에 쥔 가위라서, 버리기가 어렵다.
열여섯에 처음 바늘을 잡았다. 동일방직에 취직하려 했다. 야간학교가 있어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찾아갔다. 기준 키 156cm. 그때 키가 155cm였다. 그 1cm가 문턱을 넘지 못하게 했다. 철문이 닫히고, 홀로 담 밖에 남았다.
그 길로 신포동 한 의상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침 여덟 시 반에 들어가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어서야 나왔다. 한 달에 하루 쉬었다. 쉬는 날이 오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내려앉았다. 손에 땀이 많아 바늘이 뻑뻑하면 ‘삑삑─’ 소리가 났다. 미싱 바늘에 손톱이 물려 피가 나도 약 대신 미싱 기름을 발랐다. 가위 쥔 자리, 다리미 손잡이 잡던 자리에 굳은살이 배겼다.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래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배다리, 신포동을 오가며 스치던 골목이었다. 의상실 다섯 집 사이에 여섯 번째로 들어섰다. 연탄 타는 냄새와 다림질한 천 냄새가 골목에 엉겨 있었다. 책방이 서른 집이나 됐다. 하루에 서너 벌씩 옷을 만들었다. 직원 세 명과 밤늦게까지 바느질을 이었다. 아침이면 집현전 책방 주인이 하모니카를 불어 골목을 깨웠다.
가위를 갈고 재봉틀에 기름을 먹이고 천 위에 날을 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잘 잘린다, 그걸 넘어서 손에 딱 붙는 느낌이 있어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러다 병이 왔다. 암이었다. 가게 문을 닫은 3년 동안 남편이 곁에서 뒷바라지했다. 회복하고 다시 가게 문을 열었다. 그 남편이 먼저 떠났다. 병을 앓은 것보다 힘들었다. 언니의 권유로 댄스복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돈벌이는 좋았지만 우울증이 왔다. 다시 배다리 골목 의상실로 돌아왔다.

박태순이 오늘도 바느질을 잇는다. 오십 년이다.

연탄불에 달궈 쓰던 다리미.
“제가 바느질만 해왔잖아요. 그 세월이 저한테는 고마운 거죠….” 말끝이 흔들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가 눈가를 훔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행복해요.”
지금도 가위를 쥔다. 올해로 3년째, 배다리 축제에 패션쇼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이 모델이 되고, 골목은 런웨이가 된다. 진열장에는 다리미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연탄불 삼발이에 쇳덩이를 달궈 쓰던 것부터 스팀다리미까지. 아이들이 오면 하나씩 들어 보이며 이야기를 건넨다.
봄이 오는 줄 몰랐다. 얼마 전엔 뒤뜰 동백에 꽃몽우리가 맺혔다.
왜 아직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그가 웃는다.
“내가 미련해서 그래요.”
날이 닳은 가위가 오늘도 그 손안에 있다. ‘사각’ 둔탁한 날이 천을 밀고 지나간다.

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 앉았다.
오래된 가족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망토 위에 놓인 아들의 돌잔치 사진.
오십 년 만에 나란히 빛을 받는다.
보이지 않아도 남는 것
오래된 앨범 속 흑백 사진 한 장. 아기가 망토를 입고 있다. 목에는 리본이 달려 있다. 어떤 색인지 알 수 없다.
배가 불러오던 겨울이었다. 아들인지 딸인지 몰랐다. 어머니는 분홍 털실 뭉치를 꺼냈다. 찬 공기가 손끝을 스칠 새도 없이 바늘을 움직였다. 코바늘이 실을 끌어당길 때마다 배 속에서 발이 움직였다. 작은 망토가 완성됐다.
같은 시간, 아버지는 인천제철에서 3교대로 일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나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와 목욕탕에 함께 간 기억이 없다. 아버지 손에는 늘 쇠 냄새가 배어 있었다. 퇴근 후 그 손으로 식탁에 잠시 앉았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아버지는 시간을 모두 공장에 쏟아부은 끝에 집을 샀다. 어머니는 옷을 짓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가족을 위해.
마을 전시를 앞두고 앨범을 꺼냈다. 어머니 조순자와 아들 이진형이 나란히 앉았다. 오래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돌잔치 날 사진이 나왔다.
장롱 속에서 망토를 꺼냈다. 낡은 실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목 부분 리본이 분홍빛이었다. 흑백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던 색이었다. 어머니가 두 손으로 옷을 천천히 펼쳐 들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예쁘게 해주고 싶었어.”
오랫동안 가려 있던 색이 드러났다.
“흰색인 줄만 알았는데. 분홍색이네요.” 그가 웃었다. 어머니도 따라 웃었다.
며느리가 그 망토를 오래 간직해 왔다. 언젠가 조심스레 꺼내 손주에게 입혔다가, 다시 고이 접어 두었다. 세대를 건너온 옷이다. 어머니의 손길이 세 사람을 감쌌다.

어머니가 두 손으로 망토를 펼쳐 든다.
낡은 실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마련한 집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 산다. 이 마을의 인천창영초등학교를 그도, 그의 아이들도 다녔다.
그는 저녁마다 골목을 걷는다. 오가다 마주치는 아는 얼굴들이 많다.
“한 50년을 여기서 자랐으니까요. 앞으로도 이 동네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돼요.”
걷다 보면 다시 집 앞에 선다. 불이 켜져 있다.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1938년 건물을 고쳐 만든 작업실에서 최창훈.
비 오는 날이면 마당을 내다보며 붓을 든다.
해바라기, 늦게 피다
193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책 도매상 ‘중앙교육’이 있던 자리였다. 은퇴하면서 직접 손을 대기 시작했다. 쓰러질 듯 낡은 것들을 허물지 않고 살렸다. 주춧돌을 그대로 두고 한옥을 지었다. 1년 반이 걸렸다. 비 오는 날이면 처마 끝에서 빗물이 ‘뚝─’ 떨어진다. 마당을 내다본다. “참 좋죠.”
최창훈이 배다리에 터를 내린 건 37년 전이다. 서울에서 흘러 들어와 신간 도매상을 시작했다. 학교 교과서와 전과, 모의고사 교재를 팔았다. 아침이면 문구사 사장들이 몰려왔다. 사거리에 다방이 다섯 군데나 있었다. 배다리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동업자들은 도화동 물류센터로 떠났다. 그는 남았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이제 살만하니, 여기 헐어서 당신 놀이터로 만들어요. 당신 하고 싶은 것 해요.”
붓을 잡은 건 그 뒤였다. 주민센터 미술 수업에서 시작해 서너 해를 꾸준히 그렸다. 인하대까지 다니며 배웠다. 그러다 캔버스를 붙잡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결국 그만뒀다. 지금은 작업실에서 혼자 그린다. 비 오는 날이면 마당을 내다보며 붓을 든다. 해바라기가 벽에 걸려 있다.
꿈이 하나 있다. “손녀 지안이하고 큰 그림을 한 번 같이 그리고 싶어요. 100호짜리.”
손녀는 벌써 전시회를 두 번 했다. 할아버지를 닮았다.

‘20세기 약방’ 간판 아래 선 이철완 회장.
아버지가 스물세 살에 열었던 자리, 지금은 아들이 서 있다.
배다리 주민협의회 회장 이철완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주민들이 스스로 힘을 모았다. 그는 말한다. “사람에게 부모가 있듯이, 땅에도 부모가 있습니다. 배다리는 무엇이든 품어 안는, 인천의 어머니 같은 곳입니다.”
그에게도 배다리는 고향이다. 아버지는 1950년대 이 골목에서 스물세 살에 ‘20세기 약방’을 열었다. 전쟁이 나도 자리를 지켰다. 아들은 그 집에서 태어나 떠났다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한평생 지킨 자리에, 지금은 아들이 서 있다.
4월, 배다리가 곳간을 연다. 오십 년 된 가위, 어머니가 손끝으로 엮은 아기 옷, 기억을 담은 우체통, 한 세기를 건너온 괘종시계. 서랍 속에, 장롱 깊숙이에서 잠들어 있던 추억이 하나씩 밖으로 나온다. 봄볕이 골목 위로 낮게 번진다. 배다리는, 아직 여기 있다.
‘배다리, 기억의 곳간을 열다’
배다리주민협의회가 주민 소장품 기획전을 4월 24일부터 30일까지 7일간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에서 연다. 주민이 직접 기획·운영하는 첫 전시다. 주민 30여 명의 소장품이 생활 유물·헌책방 자료·수공예품·회화 등 4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전시 기간 중 소장자 토크 프로그램 ‘나의 수집 이야기’를 매일 운영하며, 25일에는 강철 작가의 드로잉 쇼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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