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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민요에서 가요까지,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역사 - 1편

작성자
문서정
작성일
2017-02-21
노래는 우리의 삶에 많은 작용을 합니다. 슬플 때 위로해주고 심심할 때 즐겁게 해주며 신날 때 더 신나게 해줍니다. 감정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속 긴장감 혹은 위기감을 조성할 때 사용됩니다. 때로는 등장인물의 대사나 행동 없이 노래만으로 감동을 전해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민요의 시작은 언제일까요?

민요는 우리나라 노래의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서 전해지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다, 누구 노래이다 할 것 없이 당시 서민들의 유행이었습니다. 다만 아주 오래전인 인류가 집단생활을 할 때 생겨났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함께 사냥 하고 채집을 하며 노래를 통해 정을 나누고 기운을 북돋웠습니다. 국가가 건설되고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으로 나뉘자 민요는 피지배 계층의 삶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반의 위선과 양면성을 풍자하고 비판하며 끊임없는 노동에 지친 심신(몸과 마음)을 위로해주었습니다. 대표적인 고려의 민요 <청산별곡>을 보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이상향인 청산으로 도피하려는 백성들의 현실 도피적인 소망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주었던 것이겠지요?


고려 민요 <청산별곡>


일제강점기에 민요가 서서히 잊히고 일본에 의해 서양 음악의 유입이 이루어졌습니다. 1920년대에 일본 음악 산업이 한국에 진출하였으며 경성방송국의 개설과 함께 대중가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로 인해 외국의 멜로디에 우리의 가사를 붙인 곡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창가라고 불렀지요. 윤심덕의 <사의찬미>를 아시나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입니다. 작사는 윤심덕이 했으며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 가사를 보면 완전히 다뉴브랑 전혀 상관없이 당시의 암울한 우리의 시대상을 노래했습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윤심덕이 노래를 발매한 후 연인 김우진과 함께 정사(동반 자살)로 삶을 끝맺은 것을 보아 열혈한 사랑의 노래라 합니다. 어느 해석이건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온 곡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사의 찬미>는 일제강점기의 슬픔을 달래주었습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


1940년부터 1950년대까지는 가요의 암흑기라 불리는 시기인데요, 광복과 분단, 한국 전쟁까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1960년대 새로 시작하게 됩니다. 국내 최초의 밴드와 통기타 포크 앨범이 등장했으며 밝고 경쾌한 건전 가요풍의 노래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달라진 것 없던 고달팠던 시절을 노래로 불러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 신중현이 등장하며 가요의 무대를 서서히 갖춰나갔습니다. 1970년대에는 군사 정권의 독재와 기성 문화에 반기를 든 순수한 청년 문화의 기운이 일어섰습니다. 우리가 종종 들을 수 있는 가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가수 나훈아, 양희은, 방주연 등이 있습니다. 특히 나훈아와 남진은 라이벌 구도를 통해 침체된 대중가요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이후 대중가요의 전성기가 찾아왔습니다.


신중현 앨범 사진


가요의 시초인 민요부터 1970년대 대중가요까지의 역사를 소개했습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방동진, bohemian, 네모상자 네이버 블로그
내용 출처: jugangyopo 네이버 블로그
17기 문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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