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在仁川中国故事

在仁川度过波澜起伏的一生后长眠于此的中国人们

查询数
42902

인천속 중국이야기 : 인천 중국인묘지
仁川里的中国故事:仁川华侨墓地

인천을 무대로 다이내믹한 삶을 살다 잠든 중국인들
在仁川度过波澜起伏的一生后长眠于此的中国人们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文章 李镕男 本刊编辑委员


                                              

인천 남동구 만수3동에는 인천에 잠든 중국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만수동 만월산 입구부터 만수동 성당일대에 이르는 5만3천평 땅에 중국에서 건너와 인천에서 삶을 마친 사람들이 영면했다. 이곳에 있던 중국인 묘는 1989년 인천시의 주거환경개선특례법에 따라 주안5동 철거민들에게 이 땅을 불하되자 자연스레 중국인묘지는 부평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졌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만수3동에 중국인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동네 주민들은 이곳에 중국인 묘지와 관련한 흔적이 싹 다 없어진지 오래라고 입을 모았다.
在仁川南洞区万寿3洞,曾经有中国人的公墓,从万寿洞满月山入口到万寿洞天主教堂一带的5万3千坪的土地里,安葬着从中国移居仁川,而后在此离世的人们。1989年,依据仁川市的《居住环境改善特例法》,这里的土地被转让给朱安5洞的拆迁户,于是华侨墓地就自然而然地被迁到富平仁川家庭公园,转眼间,这已经是30年前的事情。
记得万寿3洞曾有中国人公墓的社区居民们都异口同声表示,这里和华侨墓地相关的痕迹早已消失得无影无踪。


만월산에서  1974년에 사망한 송씨묘 무덤 발견
혹시나 흔적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월쉼터 뒤에 위치한 만월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월산에는 아직도 이곳이 중국인묘지였음을 증명하는 비석들이 땅속에, 산길에 묻혀있었다. 이장하면서 남겨진 비석과 꽃병, 술잔 등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在满月山发现1974年去世的宋氏墓地
带着“或许会留下一些痕迹”的想法,我来到了位于满月休息区后方的满月山,满月山的地下和山路依然埋着证明这里曾经是华侨墓地的石碑,30年过后的今天,依然可见移葬时留下的石碑、花瓶、酒杯等痕迹。

산에 오르면서 이장하지 않은 묘지 하나를 찾았다. ‘송씨묘’라고 불리는 묘였다. 만수3동 2-9 ‘송씨묘’ 라는 팻말이 붙은 이 무덤의 주인은 산둥성 출신으로 1974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친구였고, 이웃이었던 묘지들이 다 없어진 뒤에도 이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이 묘지 주인에게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在上山途中,我发现了一座没有移葬的坟墓,这座墓被称为“宋氏之墓”,墓碑上写着“万寿3洞2-9宋氏之墓”,并记载坟墓的主人来自山东省,于1974年去世。我在心中为相邻的坟墓都消失后依然坚守这个位置的墓地主人祈祷冥福。

인천의 중국인 묘지는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과도 닮아 있다. 구한말 중국인들의 위세가 당당했을 때는 인천의 요지에, 세가 약해지고, 사회·경제적으로 그들의 위치가 낮아진 다음에는 한 곳에 영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다녀야 하는 처지가 됐다.
仁川的华侨墓地和他们在异国他乡的生活也很相似。旧韩末,中国人威风凛凛时,他们的墓地建在仁川的要地,而在气势减弱,社会和经济地位变低后,他们无法在一处永眠,需四处移葬。

인천에 중국인들의 묘지가 처음 생긴곳은 인천 내동 6, 7번지이다. <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 따르면 “제물포에서 10여리 이내에 화상이 임의로 적당한 산천을 골라 가매장할 수 있는 의지(義地)를 만들되 필히 수목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넓어야 하고 더불어 분묘를 지킬 수 있는 집을 함께 건축하여야 한다. 이곳은 조선과 타국간의 맺은 의지장정(義地章程)에 처리하며 정부로부터 영원히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仁川最早出现华侨墓地的地方是仁川内洞6、7号。据《仁川口华商地界章程》记载,“华商可在济物浦10余里以内任意选择适当的山川建临时安葬的‘义地’,但必须宽至可种植树木,并建造保护该墓的房屋。此处由朝鲜和别国之间缔结的义地章程处理,永受政府保护。”

1884년 서울과 인천의 중국 영사간 편지에도 내동에 위치한 ‘화상의장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편지에는 “황제의 명에 따라 각방들은 일찍이 봐둔 화상의지(華商義地)가 있었으니 화도(花島)왼쪽에 있으며 조계와 2리 거리에 있다. 앞엔 물길이 있다, 인천부의 편리를 위해 먼저가서 경계를 정하겠다”라고 적고 있어 일찍이 내동일대를 그들의 묘지로 낙점됐던 것으로 보인다.
1884年,首尔和仁川的中国领事间的信件中也有关于内洞“华商葬地”的记录。
信中写道:“遵照皇命,各方均有早前相中之华商义地,位于花岛左侧,距租界二里,前有水路,为方便仁川府,我方将先前去设定边界”,从中可看出,内洞一带很早就被他们定为墓地。


내리에 화상의지가 생긴 것은 1884년 이후로 묘지 규모는 2,771평으로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무상임대를 받았다. 당시 땅의 주인은 중국인 왕학란(王學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산둥성 출신으로 중화민국상무총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중구 내동6, 7번지에 있던 중국인묘지는 다이쇼 원년인 1912년에 인천부외 우각리로 이전한다. 
内里出现华商义地是在1884年以后,墓地规模为2,771坪,是向大韩帝国政府正式无偿租赁的。据记载,当时土地的主人为中国人王学兰,他来自山东,曾在中华民国商务总会担任要职。
中区内洞6、7号的华侨墓地在大正元年,即1912年迁到了仁川府外牛角里。
 

도화동 중화의지 선인재단과 소송전에서 패소뒤 만수동 이전
인천화교협회 자료에는 다이쇼(大正)3,4년에 인천경찰서가 중국인 사망자를 ‘인천부 우각리 지나인 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매장허가증이 남아있다. 현재 우각리 묘지가 도화동의장지와 동일한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在与善仁财团的诉讼中败诉后,道禾洞中华义地迁至万寿洞
仁川华侨协会资料中还保留着大正3、4年仁川警察局允许将中国逝者安葬在仁川府牛角里华侨墓地的“埋葬许可证”,但目前尚不确定牛角里墓地与道禾洞葬地是否为同一场所。


                                            


내리에서 도화동 중국인묘지로 이전한 것은 1912년 경 이다. 도화동 중국인 묘지의 면적은 총29,335㎡(8,874평)에 달했다. 처음엔 21,221㎡였지만 화교들의 모금으로 묘지를 넓혔고 초창기 인천 화교들이 이곳에 묻혔다. 묘지는 인천에 뿌리를 내리는 화교들이 많아지고, 죽는 사람이 늘면서 규모가 확장됐다.
华侨墓地从内里迁至道禾洞的时间大约是1912年,道禾洞华侨墓地的总面积达29,335㎡(8,874坪),起初,墓地面积为21,221㎡,但华侨们捐款拓宽了墓地,华侨们早期都安葬于此。随着在仁川扎根和去世的华侨人数增多,墓地的规模也随之扩大。


도화동 중화의지(中華義地)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도화동 중국인공동묘지 땅을 두고 인천대학교 재단인 선인재단과 인천화교협회가 격렬한 소송전을 펼친 건 유명하다. 인천화교협회 차원에서 성광학원과 오랫동안 땅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 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화교들은 누대에 걸쳐 조상들이 묻힌 땅을 내줘야 했다. 선인재단은 중국인공동묘지에 학교를 짓고, 도로를 내었다.
道禾洞中华义地经历了许多磨难,其中十分著名的是仁川大学财团——善仁财团与仁川华侨协会就道禾洞华侨公墓土地问题展开了激烈的诉讼战。仁川华侨协会虽然和圣光学院就土地所有权问题对簿公堂许久,但最后,华侨们不得不让出了安葬祖辈的土地,善仁财团在华侨公墓所在的土地上建了学校并修建了道路。

1974년 8월 31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선인학원이 중국인 공동묘지자리에 인천의 신명물로 등장한 동양최대의 체육관을 지었다”라는 사진기사를 싣고 있다.
1974年8月31日,《京乡新闻》刊登了一则图片新闻,内容为:“善仁学院在华侨公墓所在地建造了东洋最大的体育馆,将成为仁川的新名胜”。

화교들은 결국 외국인 토지소유법 위반으로 재판에서 패소했고, 인천시가 제공한 만수동 임(林)6의 2(시유지)에 위치한 5만3천여 평의 땅을 제공받고 이장하게 된다.
最后,华侨们因违反外国人土地所有法而败诉,仁川市提供位于万寿洞林6之2(市有地)的5万3千余坪土地进行移葬。

2010년 인천시가 펴낸 ‘인천광역시 외국인묘지 정비 및 보존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도화동의 중국인묘지 중에 1959년 5월 22일 1,997기가 만수동으로 이전했다.
根据2010年仁川市发布的《仁川广域市外国人墓地整修与保存方案》报告,道禾洞的华侨墓地中有1,997座于1959年5月22日迁移至万寿洞。

도화동에서 만수동으로 중국인 묘지를 완료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인천대학교 선인재단의 전신인 성광학원이 인천화교협회에 보낸 문서를 보면 1962년까지 이장을 완료할 것을 주문했지만 64년까지 완료 되지 않아 이장을 촉구하는 자료가 있다. 1970년 인천대가 건립되면서 이장은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华侨墓地完成从道禾洞至万寿洞的迁移的时间尚不明确,但从仁川大学善仁财团的前身圣光学院寄给仁川华侨协会的文件来看,有资料显示圣光学院委托华侨在1962年前完成移葬,但直到64年都未能完成,因而进行催促。据推测,移葬是在1970年仁川大学建校时完成的。

만수동 중국인묘지는 규모가 상당했다. 만수3동 큰 도로변 뒤부터 시작해 만월산 산밑까지 묘지로 가득했다. 당시는 집 옆에 바로 묘지가 있을 정도로 정리가 안된 상태였다.
万寿洞的华侨墓地规模十分庞大,从万寿3洞马路后方到满月山山脚四处都是墓地,当时墓地杂乱无序,以至于坟墓就在民宅的旁边。

                                 

만수동에서 35년째 살고 있는 한 주민은 “중국인들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신기해 가까이 봤던 기억이 있다”며 “제사를 지낼 때 조상들이 저승에서 쓸 노잣돈인 황지를 태우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已在万寿洞生活35年的一位居民表示:“我记得当时中国人祭拜祖先的场面很新奇,所以近距离看过,他们祭祀时会给祖先烧阴间使用的黄色纸钱”。

1989년 만수동묘지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 90년 마무리
만수동이 개발되기 전 조용한 임야에 묻혔던 중국인들은 다시 영혼의 쉼터를 옮기는 상황이 1980년대 말 생겼다. 중국인묘지 자리는 주거환경개선특례법 시행으로 주안5동 철거민들에게 불하됐다. 도시가 확장되고 사람이 많아지면서 죽은 자가 산사람들에게 땅을 내주는 상황이었다.
1989年万寿洞墓地迁至仁川家族公园, 90年完成
在万寿洞被开发前,去世的华侨们被安葬在安静的林地,而二十世纪八十年代末,他们需迁移灵魂休憩之所的情况再次发生。由于《居住环境改善特例法》的实施,华侨墓地所在地被转让给朱安5洞的拆迁户们,随着城市扩张,人口增多,逝者也需把土地让给生者。

당시 이장을 주도했던 화교협회 고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만수동에서 부평가족공원으로 옮길 때 인천시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연고묘지는 1기당 45만원, 무연고 묘지는 25만원씩 지원됐다.
당시 인천시 자료에 의하면 만수동 중국인묘지의 유연고묘는 1,391기, 무연고 1,482기였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화교협회 고문들의 증언에 따르면 만수동의 무덤수는 4,000여기에 달했다고 말한다.
根据当时主导移葬的华侨协会顾问们的证言,从万寿洞移葬至富平家族公园时,得到了仁川市政府的补偿,有亲属者之墓为每座45万韩元,无亲属者之墓为每座25万韩元。
根据当时仁川市的资料,万寿洞华侨墓地的有亲属者之墓为1,391座,无亲属者之墓为 1,482座,但根据仁川华侨协会顾问们的证言,万寿洞的坟墓数量多达4,000多座。

이때부터 인천의 중국인묘지는 화교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국인, 일본인 묘지와 함께 곁방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从这时起,仁川华侨墓地的去向无法依照华侨们的意愿决定,开始和韩国人、日本人的墓地一起“寄人篱下”。

인천가족공원 내에 위치한 중국인묘역에 안치된 분묘수는 총 2,866기였다. 이 기운데 유연고가 313기였고 나머지는 무연고묘였다. 이 무연고묘는 만수동에서 이장할 당시에 이미 화장한 상태에서 옮겨졌다.
인천화교협회는 1990년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장을 마무리하면서 공원 꼭대기에 무연고자들을 기리고, 추념하기 위해 ‘무연고자위령탑’을 세웠다.
仁川家族公园内华侨墓区的坟墓总数为2,866座,其中有亲属者之墓为313座,其余为无亲属者之墓,这些无亲属者之墓在从万寿洞移葬时是以完成火化的状态迁移的。
1990年,在完成移葬至富平家族公园的工作时,仁川华侨协会在公园顶部建了“无亲属者慰灵塔”,以纪念和缅怀无亲属的逝者。


                                                          

부평 인천가족공원내에 화교담에 개장한 영혼들 안치
인천가족공원 꼭대기에 위치한 이 무연고자탑 주변으로는 아직도 중국인들의 개인묘들이 드문드문 있고, 인천에 살다 사망한 중국 광동사람들의 묘인 ‘재한광동동향회묘’ 30여개가 있어, 그들이 인천에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인천화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천에는 현재 광동출신화교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1937년 중일전쟁이 나자 대부분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광동동향회묘는 대부분 무연고로 보였다.
인천화교협회 고문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광동동향회에서 내려와 제사를 지냈다고 기억했다.
在富平仁川家族公园内的华侨墙安置亡灵
在位于仁川家族公园顶部的无亲属者慰灵塔的周围,依然稀稀落落地分布着华侨们的个人墓地,还有30多座在仁川去世的广东人的墓地“在韩广东同乡会墓”,证明着他们曾经在仁川生活。根据仁川华侨们的证言,仁川现在已经几乎没有广东籍的华侨,据说他们大部分在1937年中日战争一爆发就回到中国。广东同乡会墓大部分看起来是无亲属者之墓。
仁川华侨协会的顾问们记得,就在二十世纪八十年代前,首尔广东同乡会还会来这里祭祀。
 

1990년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장한 중국인묘의 개장은 2009년부터 진행됐다. 인천가족공원의 공원화 사업 및 정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2009년부터 시작한 개장은 2015년 대부분 끝났고, 2016년 화교담이 세워지면서 화교들의 영혼을 안치했다. 현재 화교담의 안치 규모는 5,220기이지만 현재는 216기만이 안치되어 있다. 많은 영혼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华侨墓地1990年移葬至仁川家族公园后,自2009年开始根据仁川家族公园的公园化事业和整修计划进行改葬。改葬自2009年开始,大部分于2015年完成,2016年,随着华侨墙筑起,已逝华侨们的亡灵被安置于此。华侨墙的安置规模为5,220座,但目前仅安置了216座,许多亡灵回到了他们的故乡。

                     

화교들의 묘지는 130년 장구한 화교들의 역사나 다름없다. 이곳에 화교들의 역사, 생활풍습, 이 땅에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있다. 화교들의 묘지에서 그들이 인천을 무대로 겪었을 성공, 슬픔, 로맨스 등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华侨们的墓地也和仁川华侨们130年的历史颇为相似,这里浓缩着华侨们的历史、生活风俗,以及他们在这片土地上经历过的一切。我觉得,在华侨们的墓地里,也安息着他们以仁川为舞台所经历过的成功、悲伤、浪漫等丰富多样的生活故事。


 






附件
KOGL
KOGL: Source Indication (Type 1)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