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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文化

6,70년대 인천의 결혼식과 피로연장으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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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속 인천이야기 ∥ 평화각 이야기
中国里的仁川故事∥ 平和阁的故事

6,70년대 인천의 결혼식과 피로연장으로 ‘유명’
34년 시작 짜장면·해삼탕 유명…80년대 중반까지 운영
六七十年代仁川著名的婚礼和婚宴场所
34年开业,以炸酱面和海参汤而著称......经营至80年代中期

글 이용남 본지 편집위원, 사진 周其怡 제공
文章 李镕男 本刊编辑委员,照片 周其怡提供

      


인천을 대표하는 오래된 중화요리집으로는 공화춘, 중화루를 들 수 있다. 공화춘과 중화루는 몇 번의 부침을 거친 후 공화춘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중화루는 여전히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 중국집들의 역사는 인천화교 이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说起仁川代表性的悠久中餐厅,共和春和中华楼名列其中,两家餐厅几经风风雨雨,后来,共和春成为炸酱面博物馆,中华楼依然深受着市民们的喜爱。这些中餐厅的历史和仁川华侨的移居史如出一辙。

경동 싸리재에 위치 결혼식장 피로연장소로 유명
공화춘, 중화루와 더불어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집이었던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중구 경동 싸리재에 있던 평화각이다. 이곳은 한때 인천시민들의 결혼식장이나 피로연 장소로 각광을 누렸다. 평화각은 지금 인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지만 6,70세 정도 된 시민들 중에는 경동 싸리재에 있었던 평화각을 추억하는 이들이 꽤 있다. 이들 중엔 아직도 평화각에서 먹었던 고소한 짜장면 맛을 기억한다.


6,70년대 평화각 모습



位于京洞三里寨,是著名的婚礼和婚宴场所
除了共和春和中华楼外,仁川还有一家代表性的中餐厅,它就是位于中区京洞三里寨的平和阁。这里曾经是仁川著名的婚礼婚宴场所,虽然平和阁如今已被仁川人遗忘已久,但在大约六七十岁的市民中,仍有许多人怀念曾位于京洞三里寨的平和阁,他们还记得在平和阁吃到的香浓的炸酱面味道。

평화각은 80년대 초·중반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화각을 운영했던 인천화교 주대유(周大有, 88) 씨는 1977년 평화각을 접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그후 그의 동생이 인수해 운영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평화각은 다시 한국인에게 매각됐고 1995년경 그 자리에 도로가 생기면서 건물마저 헐렸다.
据悉,平和阁一直经营到八十年代初期到中期。曾经营平和阁的仁川华侨周大有(88岁)于1977年结束平和阁的生意,移民美国。此后,平和阁由他的弟弟收购经营,但生意未能持续很久,平和阁又被卖给了韩国人,大约在1995年,它的所在地修建了道路,连建筑也被拆除了。

평화각의 이야기를 취재하고자 인천화교들을 상대로 수소문했지만 오래전에 이민 간 평화각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为了了解平和阁的故事,我们向仁川华侨四处打听,但平和阁的人们很久以前就移民了,因此要了解他们的故事并非易事。


1940,50년대 평화각 모습

다행히도 만수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인천화교인 임치유 원장이 당시 평화각 운영자들과 아는 사이였다. 임치유 원장의 도움으로 미국에 살고 있는 평화각 사람들과 연결이 됐다. 구순을 바라보는 주대유 사장은 생존해 있고, 그의 아들 주기이(周其怡)씨와 이메일 통해 평화각 이야기를 들었다.
幸运的是,在万寿洞经营中医院的仁川华侨有院长和当时的平和阁经营者们认识,在林治有院长的帮助下,我们联系上了住在美国的平和阁的人们。年近九旬的老板周大有还健在,我们通过邮件与他的儿子周其怡联系,了解到了平和阁的故事。

평화각은 공화춘과 중화루가 차이나타운에 있었던 것과 달리 인천 경동 싸리재에 있었다. 지금 경동 애관극장 옆쪽에 위치했다.
不同于位于中国城的共和春与中华楼,平和阁开在仁川京洞三里寨,位于现在的京洞爱关剧场旁。

영업은 1934년쯤 시작했다. 창업자는 인천화교인 주명창(周銘昌,1911년생)이었다. 주명창은 1928년경인 17세때 인천으로 이주했고, 그의 아들 주대유(周大有)는 1945년에 할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왔다.






餐厅大约于1934年开业,创办人为仁川华侨周铭昌(生于1911年),1928年,17岁的周铭昌移居仁川,他的儿子周大有于1945年和奶奶一起来到仁川。

주명창은 중국 산둥에서 고깃배를 수리하는 일을 했지만 생활은 빈곤했다. 그는 한국으로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사람들의 얘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기회의 땅인 인천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周铭昌在中国山东从事渔船修理工作,但生活十分贫困。他听人们说到韩国可以挣很多钱,于是,为了过上更好的生活,他决定移居充满机会的土地仁川。

주명창은 당시 인천으로 오는 뱃삯으로 계란1줄을 사공에게 주고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정식입국이라기 보다는 불법이주였던 셈이다.
인천에 온 주명창은 처음 1년은 다른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빵집을 열었다. 빵집은 장사가 잘 됐다. 주로 중국빵을 만들어 팔았는데 당시 중국빵은 인기가 많아 만드는 데로 잘 팔렸다.
当时,周铭昌给了船夫一排鸡蛋当作来仁川的船费,好不容易坐上船。他来仁川算是偷渡,而不是合法入境。
来仁川的第一年,周铭昌先是在其他店当营业员,后来开了面包店,面包店的生意很好,他主要做中式面包来卖,当时中式面包很受欢迎,做出的面包都很好卖。


주말엔 하루 14건 정도 결혼식 진행
주명창은 빵집을 운영하다 1년 뒤 동업형태로 1934년경 평화각을 열었다. 동업이었지만 운영은 주명창이 맡았다.
周末一天办14场婚礼
周铭昌的面包店开了一年后,1934年,他以合伙经营的方式开了平和阁,虽然餐厅是合伙的,但经营由周铭昌负责。

평화각의 전성기는 6,70년대였다. 주말에는 하루 14건의 결혼식이 있을 정도로 식당은 결혼식과 하객들로 붐볐다. 평화각은 결혼식도 하고 피로연도 할 수 있어 인기장소였다.
또 인근의 신신예식장에 온 하객들의 식사도 평화각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로 늘 북적 북적였다. 결혼식은 공화춘보다 평화각에서 더 많이 했다.
平和阁的鼎盛时期是六七十年代,周末一天甚至有14场婚礼,因此餐厅里挤满了宾客。平和阁既能办婚礼,也能办婚宴,因此拥有极高的人气。
此外,很多时候,到附近的欣欣结婚礼堂参加婚礼的宾客也会到平和阁用餐,因此餐厅总是门庭若市。相较于共和春,人们更多会选择在平和阁办婚礼。

임치유 한의원 원장의 평화각에 대한 추억하나. “6,70년대 평화각에서 결혼식이 많다보니 화교학교 학생들이 주말에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당시 화교학교 학생들은 예식 손님들에게 음식을 서빙하고 그 대가로 짜장면을 먹고 일당을 받았어요. 당시는 짜장면을 쉽게 먹을 수 있는 때가 아니어서 평화각 아르바이트는 인기가 높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中医院的林治有院长向我们说起他对平和阁的回忆:“我记得六七十年代很多人在平和阁办婚礼,所以很多华侨学校的学生周末都来打工,当时学生们给婚礼的宾客端食物,工作的报酬除了日薪外还有炸酱面。当时要吃到炸酱面并不容易,所以平和阁的打工机会很受欢迎。”

평화각의 인기메뉴는 짜장면과 해삼탕이었다. 춘장을 직접 만들고 해삼을 말려서 만든 음식은 다른 식당보다 풍미가 좋았다. 덴뿌라도 평화각의 대표 메뉴중 하나로 손님들이 즐겨 찾던 요리였다.




平和阁的人气菜色是炸酱面和海参汤,由于亲自制作春酱和晾晒海参,因此制作出来的食物比其他餐厅风味更佳。“天妇罗”也是平和阁的代表性菜色之一,深受客人欢迎。

평화각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원탁테이블 8개, 2층은 프라이빗룸 12개, 3층은 200~300명이 앉아서 식사가 가능했다. 하루 약 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어 공화춘과 중화루보다 규모가 더 컸다. 직원 만 해도 12~18명에 달했다.
平和阁的建筑有三层,1楼有8张圆桌,2楼有12个包间,3楼可容纳200~300人用餐。由于每天大约可容纳800多人用餐,因此规模比共和春和中华楼大,光是员工就多达12~18名。

평화각의 메인 간판은 림자풍(林子豊)선생이 썼고, 식당 출입문 간판은 인천화교학교 교장을 역임한 왕덕릉 선생의 글씨다. 왕덕릉 선생은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화교들은 기억했다.
平和阁的主牌匾由林子丰先生所题,餐厅出入门的牌匾则是由曾任仁川华侨学校校长的王德陵所题,华侨们都记得王德陵先生的字写得非常好。

여기 파란색으로 표시된 인명 한자 확인 부탁드립니다.

1977년 미국 이민… 애틀란타서 다시 평화각 열어
주명철에 이어 평화각을 운영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주대유 사장이었다. 그는 70년대 인천화교사회 발전을 주도했다. 70~74년 인천화교협회 회장을 지냈고, 70~78년 인천화교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인천화교들의 권익과 화교와 대만과의 유대관계 증진, 화교들이 인천에서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행정적 지원에 앞장섰다. 
1977年移民美国……在亚特兰大再开平和阁
继周铭昌之后,平和阁的经营者为他的儿子周大有,他在七十年代主导了仁川华侨社会的发展,并于70~74年担任仁川华侨协会会长,于70~78年担任仁川华侨学校理事长,为了保护仁川华侨们的权益,增进华侨和台湾的纽带关系,解决华侨们在仁川生活的不便,他积极走在行政支援的前列。

구순을 바라보는 주대유씨는 “화교협회 회장을 하면서 화교들의 주례를 많이 했는데 사람들의 인연을 이어주고 축복해 주었던 것을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긴다 ”고 한다.
年近九旬的周大有表示:“在担任华侨协会会长期间,我常担任华侨们的主婚人,见证人们喜结良缘并送上美好祝福,这是我人生中最有意义的事。”

평화각의 주대유씨 가족이 이민을 가게 된 배경은 한국 정부의 각종 규제와 화교차별 정책이 큰 원인이었다. 제2차 화폐개혁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시행된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으로 한국에서 경제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화교들 중엔 이 시기 미국, 대만 등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주대유씨도 마찬가지였다.
平和阁的周大有一家选择移民的很大一个原因,是因为韩国政府的各种限制和华侨歧视政策。随着第二次货币改革和朴正熙总统时代外国人土地取得与管理相关法律的实施,华侨们认为很难在韩国开展经济活动,于是这一时期有很多人移民到美国、台湾等地,周大有一家也是如此。

주대유씨는 77년 코스타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갔고, 1980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다시 평화각을 열었다. 미국에서도 평화각은 여전히 인기있는 중국집이다.
周大有于77年经哥斯达黎加到了美国,1980年在美国亚特兰大再开了平和阁,在美国,平和阁依然是深受欢迎的中餐厅。

평화각을 운영했던 주대유 사장은 50여년 정도 운영한 평화각이 없어진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 당시에 그 결정이 최선이었다며 안타까운 현실을 표현했다..
曾经营平和阁的周大有总经理表达了对现实的遗憾,他表示,很遗憾经营了50多年的平和阁消失不见,但在当时,那是最好的选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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