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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야기

청소년 정치참여, 역사 속에서 찾다.

작성자
전윤아
작성일
2016-11-15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광장, 뿌연 밤하늘 아래 백만 개의 별빛이 타올랐다. 별빛을 쥔 이들은 잘못됨을 바로 잡으러 모인, 촛불보다 더 뜨거운 애국심으로 가득 찬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촛불을 쥐고 한목소리를 내는 그 현장, 그 중심엔 청소년이 있었다.

보통 시위 현장의 주요 구성원들은 현 정치의 미래를 쥔 유권자들이 대다수이다. 자신들이 뽑은 대표가 그릇된 길로 빠져들었을 때 그것을 바로 잡는 것도 그들을 뽑은 유권자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참여한 청소년에겐 시행법상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또, 공부라는 과제를 쥔 그들은 어른들이 구상해놓은 정책과 교육과정의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청소년, 우리는 불의에 대항해 모였고, 표현했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 청소년들의 엄연한 ‘권리’이자 ‘자유’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벌써 정치색이 짙어서야…….

아직도 일부 기성세대 사이에선 학생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의견을 내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유독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민감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소년인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민주화 시대를 직접 보고 피부로 느낀 기성세대의 경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우리나라는 1945년 독립 후 1948년에 자주적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데,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이 공표될 때까지 부당한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 본 취지가 퇴색된 적이 있다. 직접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며 많은 희생을 감수한 기성세대는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을 기르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본분인 공부에만 충실히 한다면, 현세대가 대한민국을 주도할 때의 민주주의는 어떨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 기성세대들이 군사 정권에 대항하지 않았다면, 우리 선조들이 일제의 부당한 식민 통치에 대항하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오늘 기사에선 우리 현대사 속 청소년들의 정치참여 사례를 다뤄보고자 한다.

독립운동, 그 중심엔 학생들이 있었다.

1919년 탑골 공원에서의 열기를 떠올려 보자. 3·1운동을 떠올리면 모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한 이화학당 여학생들, 그 날만큼은 펜 대신 태극기를 들었던 전국의 학생들. 일반 시민들의 비폭력 운동 그 중심엔 청소년이 있었다.

본래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탑골 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한 학생들과 만나 함께 시위를 주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한 이들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공원으로 오지 못했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주도 아래 시위를 진행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3·1운동 준비 과정엔 종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학생 단체들 역시 참여했다. 근대 교육을 받은 신생 지식인이었던 학생들이야말로 당시 상황의 부당함을 알고 이에 저항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치 상황이었던 일제의 무단 통치의 저항한 학생들의 정치 참여인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1920년대엔 학생들이 항일 운동의 중심 계층으로 부상하였다. 3·1운동으로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배운 청소년들은 비밀 결사를 조직해 일제의 민족 차별적 교육에 맞섰다.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1929년 광주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이 사건은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통학 열차에서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인 남학생과 이를 저지하던 한국인 남학생 사이에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학생 대중이여 궐기하라!” -광주 길거리 학생 투쟁 격문(1929.11.12)-

싸움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은 한국 학생들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렸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 5만 4천 명이 모여 식민지 교육을 철폐하고 한국인 본위의 교육 제도 확립을 요구했다. 나아가 이 시위는 교육 범위를 뛰어넘어 식민 지배 정책을 비판하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되찾자는 항일 운동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진짜 민주주의를 세우겠습니다.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한성 여중(당시 2학년 재학) 진영숙의 글.

현 기성세대가 청소년이었을 시절 정치참여로 인해 세상을 바꾼 사례를 찾아본다면 바로 1960년 4·19혁명이라 할 수 있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중임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으로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 당선을 위해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바 있다. 이를 알게 된 학생들은 부당함에 대항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경찰에 숨진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올바른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대통령은 하야했고, 역사는 이 사건을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만약 이 사실을 알리고 개혁을 요구했던 학생들의 정치참여가 없었다면 부당함은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혁명’이라고 명명된 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당함에 대해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 국민으로서 국가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학생 주도로 우리나라의 민주 의식을 한층 더 고취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 사례를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모든 국민은 정치에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다. 대다수 학생 신분인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말처럼 정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정치 참여에서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이다. 하지만 이를 행동 없이 책상 앞에서 그저 책을 읽고 사례를 찾아보는 데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쓰일 수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우리 청소년들에겐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권’은 없어도, 국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참정권’은 있다.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이 일찍이 민주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의견을 펼쳐야 한다. 그것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되었던, 토론을 하는 것이 되었던, 필자와 같은 글쓰기가 되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침묵과 무관심이다. 침묵하는 사회는 정체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래의 주역인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평화적이고, 객관적인 정치 참여에 힘써야 한다. 목소리를 높일 줄 아는 능동적인 청소년이 되어 만드는 미래 사회의 미래는 정의롭고 활기가 넘칠 것이다.



16기 전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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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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