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일,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회비평가 겸 소설가인 존 버거가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 대부분의 청소년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 같은데요. 지금부터 존 버거의 발자취를 소개하겠습니다.
대표작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의 1972년 저서인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그가 BBC 방송에서 했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존 버거는 이 책에서 주로 작품의 양식이나 형식을 분석했던 기존의 서양미술 비평과 전통적인 미술 감상법에 도전장을 던지며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양식과 형식 뿐만 아니라 작품 의뢰자나 소유자의 지위, 작품에 담긴 정치·사회적 관점, 인종이나 젠더 문제 등을 분석해야한다는 버거의 주장은 작품 이면의 이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반 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미술 전공자들의 필독서로 손꼽히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교양서로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부커상 수상작 <G>
존 버거는 소설 <G>로 1972년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꼽히는, 우리나라의 작가 한강이 수상하면서 국내에 널리 알려진 맨부커상의 엣 이름입니다. 이야기는 유럽의 부르주아 문화 시기를 배경으로 주인공 G의 일대기를 따라 전개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입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이야기 중간중간에 철학적 사색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이 불쑥 등장하는 등의 파격적인 형식은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를 줍니다.
존 버거는 이 작품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상금 절반을 흑인민권운동을 위해 '블랙 팬더스'에 기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요. 그는 수상 연설에서 “부커상의 재원이 식민주의 착취를 통해 조성된 만큼 이렇게 기부하는 것이 내 사상에 부합한다.”고 밝혔습니다.
저서 <제7의 인간>
존 버거는 나머지 상금 절반으로 터키 사진작가 장 모르와 함께 글과 사진이 교차하는 형식의 책인 <제7의 인간>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이민노동자 문제에 대한 고발을 넘어 그들의 과거를 되짚어보고 미래를 찾아나가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다음에 소개할 영화 <존 버거의 사계>에서 존 버거가 자신의 모든 저작물 중 하나만을 남긴다는 가정 하에 선택한 책이기도 합니다.
영화 <존 버거의 사계>
<존 버거의 사계>는 틸다 스윈튼, 콜린 맥케이브, 크리스토퍼 로스, 바르테크 지아도시가 5년에 걸쳐 촬영한 각기 다른 네 개의 에세이 영화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네 편의 주제는 각각 ‘듣기’, ‘동물과 죽음’, ‘정치’, 그리고 ‘다음 세대’로, 첫 번째와 네 번째 작품은 존 버거의 다정함을,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은 그의 실험성과 단호함을 담아내 그의 다양한 철학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존 버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이야기꾼인 것은 내가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은 전선을 누비는 금지품의 전달자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2016년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상영작으로, EIDF 홈페이지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존 버거는 위에 소개된 작품들 외에도 2008년 부커상 수상 후보작에 올랐던 <A가 X에게>, 사진 비평 에세이의 기념비적 작품인 <사진의 이해>, 존 버거의 남다른 감수성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아픔의 기록>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존 버거의 주요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해 온 도서출판 열화당은 3월에 서울 종로구 통의동 온그라운드갤러리에서 추모 특별전 ‘존 버거의 스케치북 그리고 그의 초상’을 열 예정이라고 하니, 이 기사를 읽고 존 버거에 관심이 생기신 분께서는 기회가 된다면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존 버거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결코 시들지 않고 오래도록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