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이야기

영원히 남은 정신

작성자
문서정
작성일
2017-05-25
김구. 매우 친숙한 이름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고 오늘날의 상황을 미리 예견해 우리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셨다, 그렇게 평생을 우리나라를 위해 사시다 예견치 못한 마지막을 맞으셨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김구 선생님의 일생입니다. 위대하고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셨던 것만 안 채, 정작 어떤 일을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지금 바로 김구 선생님의 모든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귀한 외동아들로 태어나다


김구 선생님은 1876년 음력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명은 김창암(昌巖)으로 창성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너무도 가난한 집안 환경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말썽쟁이로 자랐습니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트려 엿 바꿔 먹는 기본적인 장난을 시작으로 자신을 놀리는 동네 아이들을 혼내 주기 위해 식칼을 들고 그 아이들의 집에 찾아가기까지 했습니다. 한 마디로 불같은 아이였습니다. 아버지 김순영도 의협심이 강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술만 마시면 부패한 양반들을 폭행해 관아에 잡혀 가 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정의감은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졌습니다.


동학교도 김창수, 새 삶을 시작하다


가난한 마을에서 어렵게 공부했던 김구 선생님은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당시 과거 시험의 비리를 보고 큰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에서 동학에 대해 듣고 동학교도 오응선을 찾아가게 되는데요, 창수(昌洙)로 개명까지 할 정도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모든 사람은 하늘이다)에 큰 쾌감을 느끼고 바로 동학도가 됩니다. 양반들에게 멸시받고 짓밟히며 개같이 살아온 천민들에게 동학을 전도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십니다. 황해도 동학도들이 모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해주성에 진을 치고 있어 후퇴하고 이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가 화해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김구는 안진사를 찾아갔고 그의 평생 스승 고능선을 만나 투철한 애국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국모 보수 사건과 을사조약 반대 투쟁


단발령과 한 나라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 일본군에 분노하여 청년 김창수는 일본인 한 명을 죽였습니다. 그는 일본군 육군 중위 쓰시다였습니다. 이 일은 24년 뒤 김구 선생님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로 떠나시고 난 다음에야 일본군에게 알려졌습니다. 김창수가 스스로 일본인을 죽였다며 떠벌리고 크게 방까지 써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는 훗날 백범일지에 이 일을 통해 조선 국민에게서 독립의 희망을 느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이 사건 이후 행세하기 편한 김구(金龜)로 개명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김구 선생님은 기독청년회 대표(예수교로 개종함)로 애국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없는 대중들은 나랏일에 무관심했고, 그들의 애국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은 대중들을 가르치는 일에 치중했습니다.


계속된 투옥


김구 선생님은 ‘한국 사람이 일본을 배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경찰서로 끌려갔지만 아무도 취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일본군은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님의 관계를 끊임없이 취조했지만 결국 죄를 씌우지 못하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데라우치 총독 암살 위조 사건 (안명근의 안악사건을 빌미로 신민회 회원 대부분을 105인 사건으로 고문함)이 일어나 김구 선생님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몽둥이로 맞으며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내 목숨을 뺏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정신을 절대 뺏지 못한다!”라며 고문의 고통과 싸웠습니다. 조작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님은 15년형을 받았습니다. 다행히도 천황이 죽어 5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새 희망이 마음속에서 빛나며 새로운 시작을 천천히 준비했습니다. 가장 먼저 일본군이 관장하는 호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 자로 바꾸었습니다. 또 호를 백범(白凡)으로 정했는데 그 이유는 백정이나 범부와 같이 천한 사람까지 온 희망을 다해 독립을 염원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 운동과 상해 임시 정부


3·1 운동 선창도 중요했지만 미래를 계획하는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상해에서 각 지방의 대표를 선출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안창호 선생님에게 자신을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하찮은 일이라도 돕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는 경무국장의 자리를 맡아 임시정부에 심어진 끄나풀들을 처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상 대립으로 임시 정부는 위기를 맡게 되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무령에 취임해 내각을 구성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만나 두 차례 거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훌륭한 두 청년이 해야 할 바람직한 일을 제시해 주었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 동포에게도 독립의 희망을 보여주는 나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국내 침공 사건과 마침내 찾아온 광복


김구 선생님은 민족을 한 덩어리로 뭉친 한국독립당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고는 한국광복군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관심조차 없었고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습니다. 1945년 1월 31일 50여 명의 청년들이 임시정부를 찾아 탈출하면서 충칭에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에 강대국 대사들이 관심을 보이고 서양의 각 통신사 기자들은 앞다투어 취재했습니다. 이로 인해 광복군과 OSS(미 육군 전략처)의 비밀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하게 광복이 찾아왔습니다. 참전국이 아닌 상태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모든 노력과 준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뜻밖의 벽


몇 십 년의 망명 끝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고향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장애물인 3·8선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족은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어 싸웠고 김구 선생님은 분열만큼은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통보는 우리 민족을 더욱 분열시켰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민족진영의 통합과 공산 진영과의 통합을 주장하였으나 정치 세력들은 권력 다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남한만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몰렸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미리 예견하셨던 거지요. 한국 전쟁과 이산가족의 영원한 고통을.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끝까지 남북통일정부를 주장하며 최후의 수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결국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김구 선생님


김구 선생님은 바라시던 바를 결국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정신만은 남아 우리를 빛 추어줄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네모, KBS 천상의 컬렉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7기 문서정 기자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청소년정책과
  • 문의처 032-440-292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