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는 크게 5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기존의 추상표현주의와는 달리 팝아트는 구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현실 속에 실재하지 않는 것을 소재로 삼아 암호화되고 기호화된 표현방식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 덕분에 인간의 감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추상표현주의는 그 당시 인기 있는 예술 사조로 나타났다. 모두가 추상을 할 때 팝아트는 구상을 다루며 새로운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팝아트는 소재를 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보이는 것으로 삼아 구상미술의 가치를 다시금 드높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팝아트는 현실의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제 2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팝아트가 형상성을 띠기는 하지만 가공과정을 거친 이미지만 사용한다. 그리고 현실의 이미지 또한 직접 느낀 현실의 이미지가 아닌, 그래픽 디자인이나 대중매체에서 표현하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세 번째로 간결하고 명확하게 평면으로 표현했고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였다. 평면으로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이전까지 지속되어 오던 회화의 특징을 벗어나 탈회화적인 요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 대부분 도구화된 성과 상업화된 성을 표현하였다. 기존의 성에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국에서 전쟁 이후 엄청난 상업 발전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성의 도구화와 상업화가 더욱 심하게 일어나게 되었기에, 팝아트에서는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 성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마지막으로 대중문화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대중문화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비판이나 도전을 하기 보다는 이를 그림의 소재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반항적인 모습을 특징으로 하는 다다이즘과 같은 예술 사조와는 현저히 다른 팝아트만의 독자적인 특징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팝아트를 다루는 화가들은 팝아트가 생긴 이래로 꾸준히 늘어왔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화가들은 팝아트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들로서 60년대 즈음의 미국 팝아트 작가들일 것이다. 그 당시에 활동하던 화가들의 이름을 나열하자면, 동부에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톰 웨셀만, 클레스 올덴버그,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이 있고 서부지역에는 로버트 인디애나, 멜 라모스, 에드워드 키엔홀츠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팝아트의 가치를 드높인 인물은 앤디 워홀일 것이다. 그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산업디자인을 전공했던 그는 사회로 나와 뉴욕에 정착해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며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60년대 기존에 계속 해왔던 상업 미술 대신 순수미술로 전환해 연재만화의 인물시리즈를 그렸으나 팝아트가 흐름을 타기 전이었기에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고상한 예술만을 중시하던 당시 뉴욕의 화랑들은 워홀의 작품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앤디 워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소재로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한 작품들을 대중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이전까지 쉽게 볼 수 없었던 작품들에 미술계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워홀에 흥미를 가지며 그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워홀은 자신의 첫 영화 ‘잠’을 촬영하고 70년대부터는 그 스스로 ‘팩토리’라고 부르는 그의 작업실에서 마오 시리즈와 같은 사교계나 정치계의 인물을 그린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로 불리던 그는 어마어마한 돈을 모으며 자본주의 시대에 최정상 위치에 올랐다. 그가 이와 같은 성공을 거둔 이유는 그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스타나 저명인사들을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그리거나 임의적으로 색채를 더함으로써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비판하고 이에 도전하며 예술의 정의를 흔드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예시를 살펴보면, ‘캠벨 수프‘, ’두 개의 마릴린‘, 재키’, ‘마오’, ‘자화상’ 등의 실크스크린이 있다. 이처럼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동시대 문화 및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비판하며 그의 비판적인 사고를 시각화해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낸 워홀은 기계에 익숙해진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면서도 그 안에 날카로운 비판을 숨겨놓아 미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호평을 받으며 190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구어간 앤디 워홀은 가히 현대미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18기 주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