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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돌아오지 못한 대한제국의 혼

작성자
주가은
작성일
2018-08-23

2016년 하반기,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 후 큰 인기를 끌며 배우 고수가 연기한 이우 왕자에 대한 관심도 또한 높아졌다. 이우왕자는 고종의 손자 의친왕(이강)의 아들로, 덕혜 옹주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먼저 잡아끄는 것은 그 당시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사이에서도 많이 언급되었다는 그의 수려한 외모이지만, 영화를 통해 이우 왕자의 일생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기사에서는 이우 왕자의 대해 다루려고 한다.

1922년 11살의 나이로 일본에 끌려간 이우는 1926년, 왕과 왕세자, 왕세손, 공(公)은 만 18세가 되면 육군이나 해군의 무관에 임용되어야 한다는 정책이 마련되며 그 해 4월 일본육군 유년학교에 강제로 입교하게 된다. 1929년에는 학업을 계속 이어 가서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또한 강제로 입교하게 되었다. 학교 졸업 후에는 포병 소위로 임관해 도쿄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전쟁 지역을 시찰하며 병사들을 위무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렇게 일본을 위한 업무를 맡아 행했지만 우리는 그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는 투철한 민족주의 정신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민족정신을 그가 일본군 장교가 된 뒤 군사기밀을 독립군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영화 ‘덕혜옹주’에서 이우왕자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묘사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이우 왕자의 독립운동은 언제까지나 설일 뿐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민족주의 정신은 어디서 엿볼 수 있을까?

"상당히 민족의식이 강하신 분이에요. 일본 군인이 됐어도 일본말을 안 하시려고 했대요. 부대 내에서도 정신병자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일본말을 안 하시고 그러셨대요. 만주에서 독립군 말을 몰래 기르고 있었는데, 일본이 전세가 이상하니까 일본으로 전출을 시켰어요."
-의친왕의 13남 9녀 중 11남인 이석

“그는 어떤 일에서도 기를 쓰고 일본인을 이기려고 했어요.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강했고,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죠. 화가 나면 조선말을 써서, 육군사관학교의 일본인 동기들이 못 알아듣기도 했으며, 술자리에서 조선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이우 왕자의 조선인, 일본인 동료들

이처럼 이우 왕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평을 계속 들어왔고, 역사학계 내에서도 이 점은 인정되고 있으며 조선 왕실 내에서 드물게(일본인으로 귀화한 형 이건과 대비되는 모습) 민족의식이 강하고, 일제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앞서 얘기했던 내용 외에도 조선인 여성과의 결혼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그의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고 하는 일제의 압박과 그 당시 박찬주가 조선인이지만 친일파라는 이유로 결혼 반대로 기운 국내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혼을 끝까지 추진했다. 친일파라는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는 내선 일체를 위한 일제의 압박(일본인과의 결혼)속에서 조선인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한 차선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마디 덧붙이자면, 한일 합병 이후 조선 왕족 중에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이우 왕자가 유일하다.

일본 내에서도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던 이우 왕자는 일제의 패배를 미리 예감한 듯, 조선 본토로 돌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일제는 일본 본토를 사수하라며 1945년 6월, 히로시마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의 일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우 왕자는 그렇게 1945년 8월 6일 말을 타고 사령부로 출근하던 중,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폭심지로부터 710m 떨어진 곳에서 그는 피폭되었고 6일에는 의식불명 상태로 살아 있었지만 7일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일왕의 항복이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며 조선이 기쁨으로 뒤덮인 날, 8월 15일에 경성에서는 이우왕자의 장례식이 치러진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는 아직까지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있다는 점이다. 가족의 동의 없이 일본은 그를 합사시켰으나 이 사실은 국내에 2007년에야 알려졌다. 죽어서도 그토록 바라던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로 그는 일본의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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