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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애국가에 대하여

작성자
주가은
작성일
2018-10-27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뜻의 애국가(愛國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이 노래.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애국가라는 것은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애국가’라는 것이 등장한 것은 조선말 개화기 이후부터이다. 주의할 점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 애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 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이 노래들을 어떤 곡조로 불렀는가는 지금까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대한 제국(大韓帝國)이 서구식 군악대를 조직해 1902년 '대한 제국 애국가'라는 이름의 국가를 만들어 나라의 주요 행사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늘날 애국가의 노랫말의 시초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고종 퇴위 등으로 나라가 흉흉하던 시절)을 전후하여 조국애와 충성심 그리고 자주 의식을 북돋우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선각자(남보다 앞서서 깨달은 자)의 손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내용을 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노랫말에 붙여진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이었다.










안익태 사진








해외에서 활동 중이던 안익태는 애국가에 남의 나라 곡조를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35년에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곡조를 작곡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해 사용했으나 이는 해외에서만 퍼져 나갔을 뿐, 국내에서는 광복 이후 정부 수립 무렵까지도 여전히 스코틀랜드 민요에 맞춰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현재의 노랫말과 함께 드디어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의 애국가가 정부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전국적으로 애창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해외에서도 안익태 작곡의 이 애국가가 널리 전파되어 실질적인 국가(國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애국가가 국가로 공식화되면서 1950년대에는 대한 뉴스 등에 담겨 적극적으로 홍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기 게양 및 애국가 제창 시의 예의에 관한 지시(1966)」 등 각종 지침ㆍ지시 등에 의해 국가의례의 하나로 점차 간주되었다. 「국기 게양 및 애국가 제창 시의 예의에 관한 지시」를 보면, 애국가 관련 의례를 제시하고 있다.

1970년대 초에는 공연장에서 본 공연 전에 애국가가 상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76년부터는 정부기관 등에서 국기 강하식(국기 게양, 하강식을 할 때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을 시행하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주요 방송국에서 국어 강하식에 맞춰 애국가를 방송하였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며 국기 강화식은 시민들의 호응도가 줄어들게 되었고 반발이 거세지자 주요 방송국의 국기 강하 식 방송,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 등은 1980년대 후반 중지되었으며 음악회와 같은 공연장의 애국가 상영도 이때 자율화되었다. 한편 1984년에는 그간 지침, 지시 등에 의해 시행되던 애국가 제창이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제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우리나라 애국가의 역사를 알아보았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애국가에는 특별히 다른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18기 주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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