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의 출발지 ‘인천’

도전의 출발지 ‘인천’

19세기 중반, 우리 나라는 구한말의 정치적 불안과 가뭄이 계속되자 국경을 넘는 유민자들이 속출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인정한 첫 공식 이민은 1902년, 121명의 우리 선조들이 제물포항에서 미국 하와이로 떠난 것이 최초이다.

그 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일을 찾아 떠난 이민자의 수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약 7,400여명에 이른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살기 어려워진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나 일본 등지로 떠났고 일제에 저항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의 입양이나 미군과의 결혼에 의한 이민이 이루어져오다가 1962년 해외이민법이 제정된 이후 취업이민이나 농업이민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 다양한 이민의 길을 떠났다.

공식이민의 출발지, 왜 인천이었을까?

1883년 문호를 개방하면서 국제 개항장으로 등장한 인천은 국제적 도시로 변모한다. 개항과 더불어 유입되기 시작한 신문물은 인천의 사회와 문화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인천사람들은 서구의 신문물을 다른 어느 지방보다 일찍 체험할 수 있었다. 또 인천에는 다양한 종교가 들어와 활동했는데, 천주교는 근대교육과 보육사업을, 성공회는 의료선교를, 감리교는 근대교육을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당시 인천에 살던 사람들은 신문물에 익숙했고, 신종교와 근대교육을 통해 신문화를 접했기 때문에, 이역만리 떨어진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고, 개척자적인 정신이 다른 지역보다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첫 이민선 갤릭호

│첫 이민선 갤릭호

갤릭호는 1885년 아일랜드에서 건조된 4,206톤 규모의 배로, 모두 6회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했다. 1905년 칼라오(Callao)라는 이름으로 선박명이 바뀌어 운항되었다

* 자료 및 이미지 출처 :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