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무역항으로의 발전

인천은 개항 이후 조선 최대의 무역항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전국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초창기 인천항에서의 무역은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은 일본 상인들과 동순태 등 청국 상인들이 경쟁하였는데, 청일전쟁 이후 청국 상인들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인천항의 구미 상사로는 영국의 이화양행, 미국의 타운센드상회, 독일의 세창양행이 대표적이었다. 영국의 이화양행은 화물 운송, 우피 무역, 광산 개발 등에 주력하였고, 독일의 세창양행은 바늘, 염료, 면포에서부터 점차 강철, 약품, 기계, 무기 등의 중계 무역으로 큰 수익을 얻었다. 미국의 타운센드상회(1884)는 증기력을 이용한 정미 공장을 설립 운영하였고, 석유와 폭약 등을 공급하였다. 그 외 영국계 상사인 홈링거상회(1896)는 밀가루, 설탕, 총포 및 면직물 등을 수입하고 한국산 미곡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출하였다.

자료출처 :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인천항 축항 하역장의 붐비는 광경 사진엽서
인천항 축항 하역장의 붐비는 광경 사진엽서 *이미지 출처 : 인천 중구청 홈페이지( https://www.icjg.go.kr)
풍류관(강당) - 2층 이미지
축항잔교에 기선이 정박해 있는 풍경 사진엽서 *이미지 출처 : 인천 중구청 홈페이지( https://www.icj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