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장 ‘인천’

19세기 중엽부터 중국,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들은 통상 요구를 계속 하였다.

결국 1883년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국제 개항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천의 제물포가 개항되자 상하이와 일본 등지를 운항하는 상선이 거의 모두 인천에 기항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과 청국 및 서구인들이 속속 밀려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물포에는 개항장을 총괄하는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가 설치되었고, 각국 영사관과 조계가 들어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국의 상 · 공업 시설과 종교, 교육, 문화 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어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 교통이 폐쇄된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 지역 사회가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항과 더불어 유입되기 시작한 외래 문물은 인천의 사회와 문화를 급격히 변화시켜 갔다. 외국인에 의한 근대적인 학교와 병원, 교회 등이 설치되고 신문이 발행되었다. 호텔, 영화관 같은 문화 공간이 등장하고, 새로운 음식 문화도 확산되었다. 천주교와 기독교도 전통적인 종교관을 변화시키며 점차 전파되었다.

* 자료출처 :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인천항 본정통 중정 사진엽서
인천항 본정통 중정 사진엽서 *이미지 출처 : 인천 중구청 홈페이지( https://www.icjg.go.kr)
풍류관(강당) - 2층 이미지
인천세관 잔교부근 사진엽서 *이미지 출처 : 인천 중구청 홈페이지( https://www.icj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