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中国城142年的历史与变迁
——从清国租界到多元文化共存的空间
인천차이나타운 142년의 역사와 변천
-청국조계에서 다문화 공존의 공간으로
撰文:李正熙
国立仁川大学中国学术院教授
글. 이정희(李正熙)
국립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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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世界各地的唐人街中,其形成和发展过程能够通过文献和条约明确确认的案例非常罕见。通常,唐人街是中国人移居海外后,在聚居和开展商业活动的过程中自然形成的。然而,仁川唐人街的形成过程是由条约规定的,相关文件也保存得相对完好。此外,在世界唐人街中,从“清国租界”起步的地方有仁川、元山、釜山三处,但至今仍保留其痕迹的只有仁川和釜山。仁川唐人街始于 1884 年 4 月清国租界的设立,今年迎来了其 142 年的历史。本文将把沉淀了韩中近现代史的仁川唐人街 140 余年的历史分为四个时期进行探讨,并提出未来应发展的方向。
세계의 차이나타운 가운데 그 형성과 조성 과정이 문헌과 조약으로 명확하게 확인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일반적으로 차이나타운은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상업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나 인천차이나타운은 그 형성 과정이 조약으로 규정되었으며 관련 문서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또한 세계의 차이나타운 가운데 ‘청국조계’에서 출발한 곳은 인천, 원산, 부산 세 곳이었는데,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인천과 부산뿐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청국조계의 설정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하여 올해 그 역사가 142년째를 맞이했다.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사가 켜켜이 축적된 공간인 인천차이나타운의 140여 년 역사를 네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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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清国租界时期(1884.4~1914.3)
仁川清国租界的设立是由朝鲜政府的闵泳穆与清国政府的总办商务委员陈树棠于1884年4月签订的《仁川口华商地界章程》所确定。1882年《中朝商民水陆贸易章程》的签订使中国人可自由移居朝鲜开港场。随着1883年1月济物浦开港,随着移居华侨激增,居住和商业活动空间的需求也应运而生。
在早于仁川开港的釜山,曾发生过华商被驱逐的事件。一个来自日本神户的华商“德兴号”在日本租界内营业,只因身份不是日本人而被驱逐。该事件演变为朝鲜政府、日本政府和清国政府之间的外交问题的同时,成为了为华侨提供居住和商业空间的契机。清国方面认为,在比釜山更靠近清国且毗邻首都首尔的仁川设立清国租界的必要性更大。通过与朝鲜政府的外交交涉,最终签订了《仁川口华商地界章程》。清国采用了“华商地界”这一名称,而非“租界”这种象征被西方列强和日本帝国主义半殖民地化的用语。
该条约条款的起草,参考了1883年9月朝鲜与日本签订的《朝鲜国仁川口租界约书》。仁川清国租界的面积为2,685坪(约8,876平方米),与日本租界相邻。随着华侨人口的不断增加,1887年朝鲜与清国签订新协定,在三里寨一带设立了第二清国租界。面积为3,853坪(约12,737平方米)。仁川华侨将原有的租界称为“旧界”,新租界称为“新界”,两个租界的总面积达到6,538坪(约21,613平方米)。仁川清国租界是朝鲜政府行政权无法触及的治外法权区域,租界的行政由清国驻仁川商务公署(领事馆)和仁川中华会馆负责,并设有相当于如今警察的“巡捕”来保护华侨的生命财产安全。仁川清国租界的运营方式与仁川的日本租界及各国共同租界别无二致。
1894年中日甲午战争爆发,随着战局向有利于日本的方向发展,驻朝鲜的清国外交机构全部撤离。随后,在日本的压力下,朝鲜政府废除了与清国签订的条约,清国租界的法律地位也随之丧失。在这一过程中,华侨的安全成为了问题。清国请求英国政府保护华侨,此后由驻朝鲜英国总领事馆和仁川副领事馆负责此事。这种情况一直持续到1899年9月《韩清通商条约》签订、两国邦交恢复为止。
利用1905年《乙巳条约》强行剥夺朝鲜外交权的日本,终于在1910年通过《韩日合并条约》使朝鲜沦为了完全的殖民地。然而,当时朝鲜仍存在着清国租界、各国共同租界以及日本租界等在内的共13个租界。为了完全殖民朝鲜,日本有必要废除这些租界。因此,1913年朝鲜总督府与中华民国驻朝鲜总领事馆之间签订了废除仁川、元山、釜山清国租界的协定。由此,清国租界被编入朝鲜的行政区域,但租界内华侨拥有的土地“永代借地权”得以维持,或可变更其所有权。这成为了日后仁川唐人街能够继续作为华侨聚居地维持下去的重要基础。
1. 청국조계 시기(1884.4~1914.3)
인천 청국조계의 설정은 1884년 4월 조선정부의 민영목(閔泳穆)과 청국정부의 총판상무위원 진수당(陳樹棠) 사이에 체결된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 의해 확정되었다. 1882년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로 중국인의 조선 개항장 이주가 자유화되었고, 1883년 1월 제물포가 개항되면서 이주 화교가 급증함에 따라 이들의 거주와 상업활동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천보다 먼저 개항한 부산에서는 일본 고베에서 진출한 화상 덕흥호(德興號)가 일본조계서 영업활동하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정부·일본정부·청국정부 사이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였으며, 화교의 거주 및 상업 공간 마련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국 측은 부산보다 청국에 가깝고 수도 서울과도 인접한 인천에 청국조계를 설치할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조선정부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체결되었다. 청국은 자신이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반식민지화되는 상징적인 공간인 ‘조계(租界)’라는 용어 대신 ‘화상지계(華商地界)’라는 명칭을 채택하였다.
이 조약은 1883년 9월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선국인천구조계약서(朝鮮國仁川口租界約書)」를 참고하여 조문이 작성되었다. 인천 청국조계의 면적은 일본조계와 인접한 2,685평(약 8,860㎡)이었다. 화교 인구가 계속 증가하자 1887년 조선과 청국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고 삼리채 일대에 제2 청국조계를 설치하였다. 면적은 3,853평이었다. 인천화교는 기존 조계를 구계(舊界), 새 조계를 신계(新界)라고 불렀으며, 두 조계를 합한 면적은 6,538평에 달하였다. 인천 청국조계는 조선정부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조계의 행정은 청국의 인천상무공서(영사관)과 인천중화회관이 담당하였으며, 오늘날의 경찰에 해당하는 순포(巡捕)를 두어 화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다. 인천 청국조계의 운영은 인천의 일본조계 및 각국공동조계와 거의 동일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세(戰勢)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조선 주재 청국 외교기관은 모두 철수하였다. 이어 일본의 압력으로 조선정부가 청국과 체결한 조약을 폐기하면서 청국조계의 법적 지위도 상실되었고, 이 과정에서 화교 보호 문제가 불거졌다. 청국은 영국정부에 화교 보호를 요청하였고, 이후 조선 주재 영국총영사관과 인천부영사관이 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9년 9월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 체결로 양국의 국교가 회복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을 통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청국조계를 비롯하여 각국공동조계와 일본조계 등 모두 13개의 조계가 존재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완전한 식민지화를 위해 이들 조계를 폐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13년 조선총독부와 중화민국조선총영사관 사이에 인천·원산·부산 청국조계 철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청국조계는 조선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지만, 조계 내 화교가 보유한 토지의 영대차지권(永代借地權)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소유권으로의 변경이 가능했다. 이는 훗날 인천차이나타운이 화교 집단거주지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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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支那町与弥生町时期(1914.4~1945.8)
1914年4月,清国租界被编入仁川府的行政区域——支那町。“支那”原本是源于印度语的中国名称,但在日本帝国主义侵略中国的过程中,被用作贬低中国人的词语,从而带有了侮辱性的含义。仁川华侨社会不断要求更改“支那町”这一名称,但未被接受。对此,仁川华侨自发地将该地区称为“中国街”。虽然仁川府在抗日战争爆发前夕更改了名称,但并没有将支那町改成华侨所希望的中国街,而是改成了“弥生町”——一个在日本随处可见的普通行政名称。
在支那町时期,仁川唐人街随着华侨经济的发展而繁荣。仁川华商从中国进口丝绸和苎麻,通过在全国建立的华侨商业网络进行销售。此外,在中餐馆、蔬菜种植、西服店、理发店等各种行业中,华侨也展现出了足以压制朝鲜人和日本人商人的竞争力。然而,进入20世纪30年代后,由于中日关系恶化、1931年排华事件、朝鲜总督府对华侨经济的打压,以及朝鲜人和日本人经济活动的扩大等多种因素的综合作用,仁川华侨经济逐渐衰退。尤其是在弥生町时期,这种现象更加严重,在光复(解放)前夕,除了中餐馆和蔬菜种植业外,大部分行业都陷入了停业的状态。另一方面,为了反抗日本帝国主义,仁川华侨组织了抗日团体“日同会”开展抗日运动。在这一过程中,有4名华侨在首尔的西大门刑务所牺牲。
2. 지나정과 미생정 시기(1914.4~1945.8)
1914년 4월 청국조계는 인천부의 행정구역인 지나정(支那町)으로 편입되었다. ‘지나’는 원래 인도어에서 유래한 중국의 명칭이었으나,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을 낮춰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모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천화교사회는 지나정이라는 명칭을 바꾸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인천화교는 스스로 이 지역을 ‘중국가(中國街)’라고 불렀다. 중일전쟁 발발 직전 인천부는 지나정의 명칭을 변경하였지만, 화교들이 원했던 중국가가 아니라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행정명칭인 미생정(彌生町)으로 개칭하였다.
지나정 시기 인천차이나타운은 화교경제의 발전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인천 화상은 중국에서 비단과 모시를 수입하여 전국에 구축된 화교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판매하였다. 또한 중화요리점, 채소재배, 양복점, 이발소 등 다양한 업종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 상인을 압박할 정도의 경쟁력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중일관계의 악화, 1931년 화교배척사건, 조선총독부의 화교경제 탄압,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제활동 확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인천화교경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미생정 시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해방 직전에는 중화요리점과 채소재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이 문을 닫는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인천화교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항일단체인 일동회(日同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4명의 화교가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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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善邻洞时期(1946~1992.8)
光复后,弥生町的行政名称改为“善邻洞”。这是一个象征韩国与中华民国之间善邻友好的名称。当时是美军政时期,由于禁止与日本进行民间贸易,以中国大陆、香港、澳门为中心的中华圈贸易变得活跃起来。善邻洞的华商利用在中国大陆、香港和澳门建立的贸易网络,主导了大中华圈贸易。结果,华侨经济得以复苏,仁川唐人街一度恢复了支那町时期的繁荣。然而,这种繁荣并没有持续多久。随着1949年中华人民共和国的成立和1950年朝鲜战争的爆发,与中国大陆的贸易及人员往来完全中断。
此外,在仁川登陆作战过程中,善邻洞一带因炮击遭受了巨大损失。尤其是与中国大陆的交流中断,给华侨经济带来了致命的打击。此后,华侨经济以中餐馆和蔬菜种植业为中心进行了重组,但由于韩国政府的各种制度性约束和社会制约,未能取得太大的发展。加上韩国人开始正式进入中餐和蔬菜种植领域,华侨经济进一步萎缩。
3. 선린동 시기(1946~1992.8)
광복 이후 미생정은 선린동(善隣洞)으로 행정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한국과 중화민국 간의 선린우호를 상징하는 명칭이었다. 당시는 미군정 시기로 일본과의 민간무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홍콩·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중화권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선린동의 화상(華商)은 중국대륙과 홍콩, 마카오에 구축된 무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대중화권 무역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화교경제가 부활하였고, 인천차이나타운은 다시금 지나정 시기의 번영을 되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국대륙과의 무역 및 인적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선린동 일대는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중국대륙과의 교류 단절은 화교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후 화교경제는 중화요리점과 채소재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나, 한국정부의 각종 제도적 규제와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중화요리점과 채소재배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화교경제는 더욱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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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仁川唐人街时期(1992.8~至今)
1992年8月韩中建交,仁川唐人街也由此迎来了划时代的转折点。朝鲜战争后中断的两国贸易得以恢复,与中国大陆的人员往来也重新成为可能。仁川广域市和中区厅开始将善邻洞扶持为韩中交流的桥头堡和吸引中国游客的中心。在此过程中,善邻洞一带被正式命名为“仁川中国城”。清国租界与支那町、弥生町、善邻洞的空间范围几乎一致,如今的仁川中国城已将其领域扩展到了附近的北城洞和童话村一带。这里不仅有4座牌楼和各种中餐馆及杂货店,还运营着负责华侨子弟教育的华侨学校、 发挥华侨社会核心作用的华侨协会、供奉中国民间信仰神灵的义善堂以及中华基督教会。仁川中国城是一个具备唐人街一切要素的、极具发展潜力的唐人街。
4. 인천차이나타운 시기(1992.8~현재)
1992년 8월 한중수교는 인천차이나타운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중단되었던 양국 간 무역이 재개되었고, 중국대륙과의 인적교류도 다시 가능해졌다. 인천광역시와 중구청은 선린동을 한중 교류의 교두보이자 중국 관광객 유치의 중심지로 육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선린동 일대는 공식적으로 ‘인천차이나타운’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청국조계와 지나정, 미생정, 선린동의 공간적 범위는 거의 일치하며, 오늘날 인천차이나타운은 인근 북성동과 동화마을 일대로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인천차이나타운에는 4개의 패루와 각종의 중화요리점과 잡화점뿐 아니라 화교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화교학교, 화교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화교협회, 중국 민간신앙의 신들을 모신 의선당, 중화기독교회가 운영되고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으로서 갖춰야 할 요소를 모두 갖춘 발전 가능성이 높은 차이나타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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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走向相互理解的多元文化共存空间
仁川中国城历经142年的岁月,即是韩中近现代史的缩影,也是韩中民间交流与文化交流的历史。同时,它也是象征开港城市仁川的开放性与国际性的代表性空间。如今的仁川中国城不仅是一个单纯的旅游景点,更是韩国华侨社会的历史与文化鲜活存在的场所,是韩中交流的宝贵遗产。期待未来仁川中国城能通过保护和利用历史文化资源,进一步发展成为韩中两国人民相互理解与沟通的空间, 乃至成为多元文化共存的象征性空间。
5. 서로를 이해하는 다문화 공존의 공간으로
인천차이나타운의 142년에 걸친 역사는 한국과 중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한중 민간교류와 문화교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개항도시 인천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천차이나타운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한국 화교사회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장소이며, 한중 교류의 소중한 유산이다. 앞으로 인천차이나타운이 역사문화자원의 보존과 활용을 통해 한중 양국 국민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공간, 나아가 다문화 공존의 상징적 공간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