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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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맛 - 영흥도 포도
포도 익어가는 시절, 영흥도 포도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 인천의 산과 들에서 자라고, 바다와 갯벌에서 펄떡이고 있을 먹거리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열두 번째는 햇살과 바닷바람 견디며 알알이 여문 맛, 영흥도 포도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알알이 영그는 희망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 - 이육사의 시 ‘청포도’ 중에서 그가 기다리던 ‘청포를 입고 찾아온 손님’이 평범해서 소중했던 일상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바이러스로, 익숙하던 삶이 멈춰 섰지만 자연은 철마다 숨 고르기를 하며 유유히 흘러간다. 8월 중순, 장마가 걷히고 무더위가 찾아왔다. 이맘때면 하루가 다르게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는다. 영흥도의 한 포도 농장. 봉지에 싸여 줄줄이 달린 포도들이 한 뼘의 볕이라도 더 쬐려고 목을 늘여 빼고 있다. 햇살과 빗물은 열매를 자라게 하고 바람은 당도를 끌어올린다. 영흥도는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한데다 해풍이 불어 포도가 자라기 적당하다. 재배 면적 47ha(14만2,175평)에 생산량은 약 61만1,350kg. 현재 60여 농가에서 포도를 재배한다. 하나농원의 홍성도(71) 대표는 아내 김금분(70) 씨와 함께 고향 땅에서 20여 년간 포도나무를 가꿔왔다. 군 시절 말고는 섬을 떠난 적이 없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2020-09-01 2020년 9월호 -
같은 하늘 다른 시간-수인선
기억 저편에서 내일로 1937년 8월 6일, 수인선 협궤열차의 첫 기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픈 역사 속 출발이었다. 일제는 경기도의 미곡과 인천에서 난 소금을 빼앗기 위해 수인선을 놓았다. 철길을 따라 우리 피땀의 결정체가 바다 건너 섬나라로 속절없이 흘러들어 갔다. 광복 이후엔 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인생의 철로 위를 달렸다. 그리고 1995년 12월 31일, 협궤열차는 멈춰섰다. 2020년 9월 12일, 폐선 25년 만에 수인선이 완전 재개통한다. 인천에서 수원까지 52.8km의 철길. ‘꼬마기차’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인선은 시간과 공간의 마디를 타고 흘러왔다. 그 길을 건너온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됐다. 그 역사는 내일로 이어진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손에 든 옛 사진(소래철교 | 김용수 | 1978년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은 협궤열차가 다니던 옛 수인선 철교의 모습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거니는 옛 철교 옆으로 수인선 전동 열차가 내달리고 있다.
2020-09-01 2020년 9월호 -
59 몽(夢)땅 인천 Ⅱ-올림포스 호텔
올림포스 호텔 앞에서 올림포스 뽐내기- 2020년 8월 월미바다역 창문으로 본 풍경무더운 여름날, 공사장 크레인이 올림포스 호텔 앞에서 ‘올리는 힘(올림force)’을 자랑하며, 철근을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 호텔의 영문 이름은 그리스 신들이 모여 산다는 Olympus입니다. 이름하고 걸맞게 한때는 인천의 선남선녀들이 모여들던 핫 플레이스였죠. 인천 내항 재개발로 이 일대가 화려했던 옛 영광을 되찾길 기원합니다. 글·사진 백상현 본지 편집인
2020-09-01 2020년 9월호 -
인천의 아침-수인선
수인선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2020년 8월, 새로운 소래철교 위를 달리는 수인선침목 사이로 내려다본 갯벌은 아찔했다. 회오리를 돌며 거칠게 흐르는 바닷물은 시커먼 블랙홀처럼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한두 발짝 내디뎠던 발걸음을 접고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과의 ‘누구 간이 더 큰가’ 게임은 1분도 안 돼 끝났다. 술기운이긴 했지만 녀석은 성큼성큼 다리를 잘도 건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협궤열차가 지나던 ‘소래철교’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다리였다. 하루 세 번 수인선이 지나는 시간을 피해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다녔다. 곤쟁이젓갈, 고년조개젓갈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 소금을 어깨에 짊어진 염부들이 소래철교를 건너는 모습은 위태로웠다. 6·25전쟁 시기 소래철교를 건너던 피란민들이 많이 빠져 죽기도 했다. 소래철교의 주인은 ‘수인선’이었다. 협궤 열차, 꼬마 열차라 불린 수인선의 철로 폭은 일반 철로의 반 토막에 불과했다. 열차 크기가 작고 2량~3량만이 붙어 운행했다. 군데군데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앉으면 무릎을 펴기가 어려웠고, 불콰해진 사내들의 막걸리 냄새가 풍겨오기 일쑤였다. 새우젓, 생선 냄새가 진동하고 개똥참외가 굴러다녔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수인역에 서는 장터에 내다 팔 것들이었지만, 열차 안 즉석 흥정이 이뤄지기도 했다.누군가에겐 동화의 세계로 기억되기도 했다. 8년 전 만난 소래 출신 연극인 박정자 씨는 “열차가 덜컹거리며 소래철교 위를 천천히 지나갈 때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버스운전사처럼 바로 내 앞에 앉아 운전하
2020-09-01 2020년 9월호 -
명문교를 찾아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우리는 ‘인천여상인’입니다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네 번째 등굣길을 따라 신생동 언덕길을 올랐다. 일제의 강점과 광복이 교차했던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75년 찬란한 역사 품은 그 길을 문해자 총동창회장(20회 졸업)과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역사의 소용돌이가 만든 역사1945년 4월 12일,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인천 최초 여성 상업학교의 탄생이었다. 지금의 신생동 언덕 위가 아니었다. 당시 율목동에 있던 인천상업학교 건물을 빌려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첫 입학생은 한국인 학생 25명과 일본인 학생 25명이었다.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인천과 경기, 서울에서까지 학생들이 몰렸다. 뜨거웠던 시간도 잠시. 개교 4개월 만에 찾아온 광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를 혼돈에 빠트렸다. 일본인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한국인 학생만으로는 수업이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제 동원됐던 인천상업학교 남학생들까지 돌아오면서 그나마 빌려 쓰던 교사校舍마저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존폐의 위기를 맞았지만 역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이원옥 교장의 노력으로 인천제1공립초등학교(현 송림초등학교의 옛 교사) 교실 몇 칸을 빌려 학생을 모집했다. 허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광복과 함께 피어난 뜨거운 교육열로 또 한 번 이사를 가야만 했다. 얄궂은 역사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2020-09-01 2020년 9월호 -
소소한 인천 이야기-인천 소사
1978.09.09. 부평지하상가 준공인천에서 붐비는 곳 중 하나, 부평역이다.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이라면 역과 연결된 부평지하상가의 풍경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둥근 광장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은 상가의 행렬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 그 규모는 세계도 인정했다. 부평지하상가는 2014년 11월 단일 면적 세계 최다 점포를 가진 상가로 ‘월드 레코드 아카데미’에 등재됐다. 부평역 언저리부터 문화의거리까지 1.8km, 총 3만1,692m2 면적에 1,400개가 넘는 개성 만점 점포들이 운영 중이다. 하루 유동 인구만 10만여 명.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과 셀 수 없이 많은 길, 빼곡한 점포들을 보면 어디서부터 둘러봐야 할지 고민될 정도다.그때, 9월의 인천은…1899. 09. 18 인천~노량진 간 철도 개통(최초의 철도)1957. 09. 15 맥아더 장군 동상 제막식 거행(자유공원) 1960. 09. 06 애관극장 신축 개관1960. 09. 17 인천역 역사驛舍 준공1975. 09. 25 인천버스종합터미널 준공1983. 09. 01 인천지방법원과 인천지방검찰청 개원1984. 09. 15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준공1987. 09. 16 인천보훈회관 기공
2020-09-01 2020년 9월호 -
소소한 인천 이야기-인천 지명
세 개의 뿔이 모인 쇠뿔고개창영동은 구한말부터 우각리牛角里라 불리던 지역이다. 우각리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주변, 인천세무서가 있는 언덕을 말한다. 이곳을 우리말로 ‘쇠뿔고개’라 불렀는데, 이를 그대로 한자로 바꾼 이름이 우각현牛角峴이다. 여기서 우각리가 나왔다. 따라서 우각리의 원래 이름은 쇠뿔고개다. 쇠뿔고개는 일반적으로 언덕의 모양이 소(牛)의 뿔(角)처럼 휘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 모양이 실제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쇠뿔고개를 삼각산三角山처럼 봉우리(角)가 세(三) 개인 고개, 곧 ‘세뿔고개’의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창영동은 쇠뿔고개(우각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송림산(수도국산)과 예전에 박태선 씨의 전도관이 있던 언덕이 비교적 높게 서 있다. 따라서 이들 세 곳을 세 개의 뿔로 보아 세뿔고개라 부르던 것이 쇠뿔고개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이와는 달리 쇠뿔이 쇠불(鐵火), 곧 쇠를 녹이는 곳이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이 옛날 쇠의 생산지여서 쇠를 녹여 물건을 만들던 곳이었기에 쇠불 또는 쇠불골로 불리다 쇠뿔고개가 됐다는 말이다. 이는 바로 옆 동네인 금곡동의 옛 이름이 쇠골, 쇳골이었던 것이 옛날 쇠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해석과 똑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광산이나 제련소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아직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미뤄둘 수밖에 없는 해석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쇠뿔고개’가 ‘세뿔고개’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는 해석이 그나마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2020-09-01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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