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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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⑨ 송도역전시장
기적 소리 너머, 빛나던 그 시절‘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협궤 열차 기적 소리 울리던 송도역 ‘반짝시장’의 기억. 전봉선 화백이 그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송도시장ㅡ야채 가게 360x510(mm) Watercolor on Arches paper 2020송도역전시장.60여 년 전 송도역, 열차 시간에 열린 ‘반짝시장’에서 시작했다.복숭아 향기 물씬한 송도역발그스름한 빛깔의 잘 익은 복숭아는 보는 것만으로 침이 고였다. 보송보송한 살갗을 대충 훑어 한입 베어 물면 단물이 주룩 흘렀다. “복숭아도 그런 복숭아가 없었어. 지금은 어떤 과일을 사 먹어도 그 맛이 안 나.” 여든을 넘긴 어머니는 1970년대 송도역 ‘반짝시장’에서 물건과 바꿔 사 먹던 복숭아 맛을 잊지 못한다. 반월1리, 2리에서 자라 협궤 열차를 타고 인천으로 온 것이었다. 복숭아가 무르익어가는 이맘때면 장터는 더 왁자했다. “그때가 좋았어. 먹을 것도 맛나고. 그냥저냥 먹고살아도 사람들이 순수했지.”너도나도 가난하던 시절. 보잘것없는 자리, 변변치 못한 살림에도 마음은 넉넉했다. 1978년 송도역 앞에서 옷 장사를 시작한 이의영(81) 씨는 오늘 송도역전시장에서 아들과 방앗간을 꾸리고 있다. 아들 하나, 딸 둘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고 평생을 시장통에서 복닥거리며 살아온 세월. 돌아보면 먼 일처럼 느껴진다. 때론 고단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1937년 8월 6일, 수인선
2021-09-01 2021년 9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⑨ 소래 협궤용 증기기관차(인천시 등록문화재 제4호)
서민의 애환 싣고 인천~수원 달린 꼬마열차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덜컹덜컹, 흔들흔들…’ 협궤 열차는 염전, 소래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 가운데 하나다. 마주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열차 크기도, 철로 폭도 작기 그지없어 꼬마열차라고도 불렸다. 열차가 기우뚱거리면 객실에선 참외며 사과 같은 과일들이 굴러다녔고, 젓갈과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기 일쑤였다. 용현동 ‘똥고개’를 넘을 때면 낑낑대는 바람에 학생들이 뛰어내려 뒤에서 밀었다느니, 버스와 부딪혀 기차가 나자빠졌다느니 하는 얘기가 기차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서민의 애환을 싣고 달리던 협궤 열차가 처음 기적을 울린 때는 1937년이다. 일제는 1930년 소래에 염전을 조성한 데 이어 철도(수인선)를 부설했는데 이 소래염전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금은 탄약의 중요한 재료였으므로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일제에겐 반드시 필요한 물자였다. 1935년 9월 23일 민간 철도 회사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인천~수원 간 철도 부설권을 인가받는다. 1936년 5월 16일 시작한 철도 공사는 1937년 8월 6일 완공됐는데 철로의 폭이 경인선의 절반(76.2cm)에 불과했다. 협궤 열차는 소래, 남동, 군자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부지런히 인천으로 실어 날랐다. 앞서 경기도에서 생산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했던 수려선(수원~여주)을 인천항으로 연결하는 역할도 했다. 광복 이후 협궤 열차는 잠깐 동안 미군들의 기름 수송용으로 쓰이다가 1946년 국가에 귀속되면서 국철로 다시 태어난다. 협궤 열차가 ‘느려지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이다. 교통수단이 다양해지면서 협궤 열차 이용객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1973년부터 ‘송도
2021-09-01 2021년 9월호 -
소소한 인천사-인천 지명
소소한 인천사인천 지명여덟 팔八 자 모양의 섬, 팔미도 1950년 9월 15일, 1903년에 세워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인 팔미도 등대에 불이 켜졌다. 이를 신호로 펼쳐진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장면으로 손꼽힌다.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5km 떨어진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팔미도八尾島는 무의도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일반적으로는 사주砂洲로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하고 있어 팔미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이 섬은 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데, 김정호의 에는 ‘팔미八未’로, 에는 ‘팔산八山’으로 표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그 모양이 팔八 자를 닮아서 생긴 것은 분명한 듯 보이는 대목이다. 동네 사람들의 입을 빌리자면, 팔미도는 본래 우리말로 ‘여달미’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가 팔미도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여달’은 여덟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는 꼬리(尾)로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없다. 이보다도 ‘미’는 ‘산’을 뜻하는 우리말 ‘뫼’에서 발음이 바뀐 것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는 월미도와 똑같은 경우로, 한자 ‘미尾’는 그 원래 뜻을 잘 모르고 그냥 갖다 붙인 것을 후에 사람들이 다시 살을 붙여 ‘섬의 꼬리 모양이 팔八 자’라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월미도뿐 아니라 실미도 등 주변의 섬들이 대부분 비슷한 경우로 보인다. 한편 해가 질 무렵 이곳 팔미도를 돌아드는 배의 풍경은 무척 아름다워 인천 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인천 소사 1960. 09. 06 애관극장 신축 개관애관극장은 1895년에 탄생한 국내 최초의 실내 극장이다. 처음 이름은 협률사協律舍로, 1902년 문을 연 서울 정동의 협률사
2021-09-01 2021년 9월호 -
인천의 아침-동인천의 귀환
동인천의 귀환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2021년 8월 동인천역 앞 광장. 왼쪽 파란 건물이 대한서림이다.후배가 소개팅을 해준다기에 신포동 ‘00레스토랑’으로 나갔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메뉴판을 열어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학생 신분으로 사 먹기엔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던 것이다.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상대는 애프터 신청을 쌀쌀맞게 거절했다. 기분 전환 겸 인근 옷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격에 다시 한번 놀라고 주인의 눈총을 받으며 빠져나왔다. 20대의 어느 날 겪은 동인천 신포동의 기억이다.1980년대만 해도 신포동엔 고급 음식점과 의류 브랜드가 즐비했다. 신포동은 당시 인천의 명동이었고 신포동을 품은 동인천은 인천에서 가장 붐비는 지역이었다. 번화한 상권과 시장, 거대한 주거지와 공장 등이 형성돼 전철은 물론, 웬만한 시내버스 노선은 다 동인천을 거쳐 갔다. 용동 마루턱을 경계로 신포동과 경동이 어른들의 공간이라면 동인천역과 가까운 인현동은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동인천역엔 학생들이 새 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중고, 인성여중고, 상인천여중, 축현초등학교 등 인현동 반경 300m 안에 학교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문구점과 체육사, 화방, 학원, 탁구장, 분식집이 덩달아 성업을 이뤘다.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과 같은 분식집엔 늘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1층은 문구점과 화방, 2층은 디제이DJ가 있는 분식집으로 운영한 대동학생백화점도 학생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 서울에 ‘종로서적’이 있다면 인천엔 ‘대한서림’이 있었다.
2021-09-01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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