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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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 - 강화도 장화·내리
노을, 빛으로 떠오르다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한 해가 저물어갈 즈음 강화도 가는 길과 다다른 남쪽 마을을 김정아 작가가 그렸다. 다난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일 더 행복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뱃길 따라 강화로Ⅰ, Ⅱ 297 x 210(mm)_종이 위 채색_2021 한 해의 끝자락, 강화도 남쪽 끝으로 달려간다. 오늘 지는 노을은, 내일 태양으로 더 찬란히 떠오를 것이다. 그림 속 조형물이 뱃길 위에서 올라탄 건 ‘강화 순무’강화도 남쪽,해 지는 마을로모두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도 묵묵히 버티며 잘 살아냈다. 한 해의 끝자락, 강화도 남쪽 끝으로 달려간다. 그 섬, 그 바닷가엔 햇살보다 아름다운 노을이 내린다. 그 빛은 내일 태양으로 더 찬란히 떠오를 것이다.강화도 화도면 장화리 ‘해넘이 마을’. 바다와 땅, 삶이 만나 빚어낸 길 위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이연숙(60) 씨는 화도면 최초의 여성 이장이다. 41 대 34, 6년 전 일곱 표 차이로 처음 마을 대표가 됐다. 토박이도 남성도 아닌 그가 이장으로 선출되자, 작은 시골 동네는 잠시 술렁였다. 하지만 마을 일이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서고,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따르고 때론 돌봐온 그다. 부녀회장 일도 6년이나 맡은 책임을 다해왔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그는 IMF 파고에 휩쓸려 인천 도심에서 섬으로 흘러들어왔다. 언
2021-11-29 2021년 12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인천문학초등학교
인천의 역사 품은 인천의 학교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아홉 번째 등굣길을 따라 초겨울 고즈넉한 문학동으로 간다. 승학산 자락 아래,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인천의 정기精氣 품은 인천문학초등학교. 100년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100년을 써 내려가고 있는 그 길을 권효린(12) 학생과 함께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문화재 정기 품은 100년의 역사인천문학초등학교(이하 문학초)로 가는 길. 거리거리 낙엽에 늦가을 정취가 물씬하다. 인천도호부관아 앞에 다다르자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진짜’를 만나고 싶다면 발걸음을 더 옮겨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인천도호부관아는 재현물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의 흔적은 문학초에서만 찾을 수 있다.“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뭔지도 몰랐어요. 학년이 올라가고 선생님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 학교가 대단한 학교구나 생각했죠. 내가 사는 인천의 귀중한 문화재를 매일 매일 만날 수 있으니까요.”인천도호부관아는 조선 시대 지방 관청 건물이다. 1982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청사로 지정됐다가 2019년 10월 7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문학초에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객사와 동헌의 일부다. 객사는 1460년에, 동헌은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인천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화도진도’를 근거로 문학초 인근 부지에 별도로 인천도호부관아를 복원했다.“선생님께 부평도호부관아도 부평초등학교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2021-11-29 2021년 12월호 -
인천시 일상 회복 민생 경제 지원 대책2021-11-29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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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재 이야기⑫ 보문사 마애관음좌상
‘올 한 해도 열심히 사느라 수고 많았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미소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2021 보문사의 마애관음좌상강화도의 형제 섬인 석모도 ‘보문사’에 가면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 ‘마애관음좌상’(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9호)이다.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비스듬히 경사진 바위 표면에 돌을 깎고 쪼아 새긴 마애관음좌상은 높이 9.2m, 너비 3.3m의 거석 불상이다.마애관음좌상이 이 자리에 오신 건 1928년이다. 당시 주지였던 배선주 스님은 금강산 ‘표훈사’ 이화응 주지 스님과 함께 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한다. 배선주 스님의 첫째 아들인 배정만(91) 옹은 “아버지가 주지로 부임한 뒤 매일 눈썹바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구상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화응 선사와 함께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기 시작해 3년 만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 오직 석공의 손으로만 새긴 것”이라며 “석공의 후손들이 아직까지 석모도에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애관음좌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병淨甁을 받쳐 든 채 연화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턱까지 내려온 긴 귀와 두툼한 코에선 부처님의 자비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마애관음좌상을 덮고 있는 거석은 ‘눈썹바위’다. 마치 고인돌의 덮개돌처럼 생긴 이 바위는 사람의 눈썹처럼 생겼다 해서 눈썹바위란 이름이 붙었다.목청이 좋고 불경을 잘 외웠던 배선주 스님이 보문사 주지로 오자 보문사는 신도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출생인 배선주 스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6살에 전등사로 출가했다. 이후 의
2021-11-29 2021년 12월호 -
소소한 인천사 - 인천 지명
자줏빛 제비섬이었던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영종도의 본래 이름은 자연도紫燕島다. 자줏빛 또는 보랏빛 제비섬이라는 뜻이다. 에는 이 섬에 대해 “자연도는 인천도호부 서쪽 27리 되는 곳에 있으며 주위가 55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도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고려 인종 때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귀국 뒤에 여러 가지 견문을 모아 엮어낸 의 기록대로 ‘경원정 맞은편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경원정은 고려 때 중국의 사신이나 상인들이 오가는 길에 묵었던 객사로 지금의 구읍뱃터 주변에 있었다. 구읍 일대는 현재 영종도 본 섬과 이어져 하나의 섬이지만, 원래는 조선 후기까지도 자연도에 딸린 조그만 섬으로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긍이 ‘경원정 맞은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김정호의 에도 영종도는 자연도 앞에 조그만 섬으로 떨어져 따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효종 때 군사적 필요에 따라 화성군 남양면에 있던 군사기지 영종진이 이 조그만 섬으로 옮겨 오게 된다. 그러고 나서 자연도와 다리를 놓아 연결하고는 다리 이름을 만세교라 불렀다. 이때 남양에서 옮겨 온 영종진이 이곳에 자리 잡은 뒤로 계속 같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자연도는 차츰 영종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갔고, 마침내는 그 원래의 이름을 밀어내고 이제 제 이름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만세교 역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 뒤로 계속된 두 섬 사이의 매립에 따라 영종진이 있던 섬과 자연도는 이어지게 됐다.]인천 소사1902. 12. 22 제1차 하와이 이민, 제물포항 출발1902년 12월 22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승인 아래 해외 이민
2021-11-29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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