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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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TMI ⑨ 쇠뿔고갯길
아련한 그리움, 쇠뿔고개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 호에는 배다리에서 도원역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쇠뿔고갯길’을 거닐었다. 비탈진 그 길엔 굴곡진 근대사를 교육과 자립의 열망으로 살아낸 인천시민들의 정신이 맥맥이 이어지고 있었다.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도움말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제물포항에서 서울 가던 옛 경인가도京仁街道, 일제강점기 민족의 앞날을 밝힌 길, 지난 한 세기 공동체를 따스히 품은 비탈길이 새 시대의 질문 앞에 놓였다.2022년 여름, 재개발로 철거되고 있는 쇠뿔고개의 마을.“100년 넘게 이어진 교육 열망, 창영초”‘인천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자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된 옛 교사校舍 앞에는 횃불 모양의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1919년 3월 6일 정오, 인천 3·1운동의 불씨가 교정에서 타올랐다. 상급반 학생들이 만세의 첫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어느 단체의 지령이나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발적으로 항일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대한 독립 만세!” 목이 터져라 외친 피맺힌 함성은 배다리, 동인천역 부근 채미전 거리 등 시내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궐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116년 역사가 깃든 배움터는 우리 민족의 교육열과 자립의 열망을
2023-03-02 2023년 3월호 -
인천의 아침-칼럼
팔미도등대 ‘120년 불빛’과의 대화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두 개의 섬이 마치 ‘八’ 자 모양으로 뻗어 내린 꼬리처럼 보여 이름 붙여진 팔미도. 연안부두에서 유람선 타고 50분이면 도착하는 13.5km의 거리. 한 시간 정도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팔미도는 아담하다.팔미도는 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섬이었다. 다만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지도 ‘청구도’엔 팔미八未로, ‘대동여지도’엔 팔산八山으로 표시돼 있다. 낙조를 받으며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 아름다워 팔미귀선八尾歸船이라고 불리며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히던 명승지였다.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섬에 등대가 들어선 때는 1903년이다.개항기 우리나라를 넘보던 서구 열강들은 이양선을 앞세워 인천으로 밀려든다. 새로운 침탈지로 정치·경제적 거점을 삼는데 개항장 인천만큼 적당한 곳도 없었다. 팔미도는 인천으로 가는 바닷길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했고,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섬이었다.가장 먼저 마수를 뻗친 나라는 일본이다. 개항하던 해 일본은 조선 조정과 체결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는 규정을 명시한 터였다. 조선이 저물어가던 1901년, 일본은 규정을 들어 등대 건설을 촉구한다. 일본의 등쌀을 견디지 못한 조선 조정은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 등대와 백암 등표 건설을 시작해 1903년 6월 완공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그렇게 불을 밝혔다.47년 뒤인 1950년 9월, 팔미도에 특명이 떨어진다. “9월 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혀라.” 비밀리에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도쿄(東京) 유엔군 총사령부가 팔미도에 들어가 있던 한국
2023-03-02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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