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사월 풍경-캠프마켓의 흔적과 기억
캠프마켓의 흔적과 기억 금단禁斷의 땅에서 수집한 박제된 ‘아픔’그들이 나갔다. 떠나면서 ‘흔적’을 남기고 갔다. 숨기고 싶은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돈 될 만한 것 등은 모조리 가져갔다. 건물은 가져갈 수 없었다. 무기를 만들었던 병기창과 군수품을 쌓아놓았던 창고 그리고 자신들이 머물렀던 막사 등을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갔다. 그 안에는 그들의 행적이 파편화돼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아픔도 박제화돼 또렷하게 박혀 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39년 부평에 육군조병창을 세우고 매달 소총 4,000정, 탄환 70만 발 등의 무기를 생산했다. 그 땅은 1945년 일제 패망 후 그해 9월 인천항으로 상륙한 미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부평벌에 왜색풍이 한바탕 스쳐 지나가고 양키 문화 바람이 불어닥쳤다. ‘애스컴시티’라는 철조망을 둘러치고 이곳을 80년간 금단禁斷의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글·사진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우리 땅에서 우리는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미 헌병대 군견軍犬 막사 입구. 한글·영문의 각종 표식.‘빵 공장’ 등 부대 내 우편물 분리대.PX로 사용되었던 1950년대 지어진 퀀셋 건물. 이번에 철거되었다.부평의 미군 부대는 점차 축소된 채 ‘캠프마켓’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이제 그 땅은 우리에게 반환된다. 1단계 A, B구역으로 나눠 돌아온 그 땅은 병든 채 우리 품에 안겼다. 부대 내 많은 토양이 다이옥신류로 심하게 오염된 상태다. 이 땅은 활용에 앞서 먼저 치료부터 받아야 한다. 정화 작업을 위해 A구역(부대 북측) 23개 건물 중 16개 동은 허물고 미군 탄약고 벙커, 군견 막사, 초소 등 7개 동만 남긴다. 오염된 토양은 태우기도
2020-04-01 2020년 4월호 -
인천의 아침
4·19 60주년, 민주화·노동 운동의 메카 인천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머리에도 눈썹에도 두툼하게 톱밥 가루가 쌓였다. 마스크를 두 장씩 썼음에도 코를 풀면 시커먼 이물질이 끝도 없이 나왔다. 반원 모양으로 돌아가는 쇠 톱날에 손가락을 잘릴 뻔한 일도 있었다. 인천시 서구 가좌동 A목재 공장의 작업 환경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노란 월급 봉투엔 만원짜리 몇 장과 천원짜리, 그리고 동전이 뒤섞여 있었다. 일이 끝나면 반장이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는 게 그나마 하루의 유일한 낙이었다. 반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반장은 월급의 대부분을 밥 사는 데 쓰는 것 같았다. 친구의 제안으로 공장에 다닌 시기는 ‘5·3항쟁’이 터진 직후인 1986년 여름이었다. 당시 ‘운동권’이던 친구는 과 같은 책을 슬쩍슬쩍 전해주더니, “방학인데 놀면 뭐 하냐, 용돈이나 벌자”며 공장으로 데려갔다. 명분은 용돈 벌이였으나, 그의 목적은 순진한 친구의 ‘의식화’였다. 소심한 탓에 운동권에 합류하진 못했지만 대학 시절 내내 ‘무임승차 열병’을 앓아야 했다.1970~1980년대 많은 운동가와 학생들이 인천에 산재한 공장에 들어간다.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위장 취업이었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서 “자본가, 군사독재 정부에 맞서 싸워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의식화 교육을 진행한다. 멀쩡한 학생들이 ‘빵잽이’(수감자)가 됐고, 간첩으로 둔갑해 신문에 나왔지만 투쟁은 계속됐다. 고 김근태 의원, 하종강 교수 등 노동운동가들의 거점이던 ‘인천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은 지하운동 조직들이 큰 축을 담당했다. 그렇게 1970년대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 1987년 6·10항쟁의 불을 지핀 1986
2020-03-31 2020년 4월호
- 자료관리담당자
-
- 담당부서 홍보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4
- 최종업데이트 2024-01-10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