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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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하늘 다른 시간-6·25전쟁 70주년, 교동도
70년의 기다림,2.5km의 그리움 섬과 육지가 끊긴 게 바다 탓은 아니다. 단 2.5km의 바다를 사이에 둔 아픈 역사의 간극.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은 6·25전쟁으로 철책이 둘러쳐지면서 ‘남북’으로 갈라섰다. 유배의 섬 강화도에서 또 유배된 섬 교동도. 그 안에는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잠시 머물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강산이 일곱 번 변했다.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낯선 땅으로 떠밀려 와야 했던 뼈아픈 기억. ‘죽기 전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고, 몸은 너무 늙었다. 이제 쉽사리 기대를 품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념의 파도가 달려들던 섬마을에도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
2020-06-02 2020년 6월호 -
호국보훈의 달-6·25 참전 유공자
그 날의 기억, 나라를 위해 바친 푸른 청춘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청춘을 바친 6·25 참전 용사들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되면 가슴이 더 먹먹해진다.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던 순간, 전장에서 스러져간 전우의 모습 등 처참했던 당시의 참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자 9·15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는 해다. 전쟁 후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 참혹한 기억을 갖고 있는 세대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동안 잊고 살았다 해도 잠시라도 나라를 위해 싸웠던 분들을 기리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열다섯 어린 나이에 입대한 을지타이거여단“지금도 눈을 감으면 고향이 떠올라. 평양에 살았는데, 이제는 뭐… 죽기 전에는 가볼 수 없는 곳이지.” 이춘자(89) 할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눈빛엔 많은 표정이 담겨 있다. 이내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아흔을 앞둔 그에게 그날의 포화 소리와 피란민들의 아우성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평양 시내에서 피란 나올 때 사리원이 막힌 거야. 그래서 황해도 해주에서 연백으로, 연백에서 교동으로 들어온 거지. 교동 들어오는 갯벌에서 오빠는 인민군에게 잡혀가고, 엄마와 나랑 동생들만 간신히 빠져나왔어.” 그는 열다섯 살 꽃다운 나이에 교동에 주둔해 있던 을지타이거여단에 입대했다. 전쟁 통에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군에 입대했지만, 그 전쟁이 3년을 훌쩍 넘길지 상상도 못했다. “그냥 군에 있으면 밥은 먹겠다 싶어서 열여덟 살이라고 나이를 속여 입대했는데, 전쟁이 그렇게 길게 갈지 몰랐지.”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연
2020-06-02 2020년 6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창영초등학교
찬란하고 영화로운 역사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첫 번째 등굣길은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 ‘창영초등학교’다. 굽이굽이, 찬란하고 영화로운 역사로 빛나는 그 길을 인천시 홍보대사 오유민(영종중학교 2학년) 학생이 따라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 탄생창성할 ‘창昌’에 영예로울 ‘영榮’. 이름 그대로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교육의 첫발이자 명예로운 역사의 시작점이다. 1883년 개항과 함께 몰려든 외세는 조선인들을 지금의 동구 창영동 일대로 밀어냈다. 이후 1899년 개통된 경인선을 기준으로 마을은 위아래로 갈라졌다. 북촌과 남촌. 당연히 조선인의 몫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던 남촌이었다. 비루한 삶 속,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교육이었다. 남촌 주민들은 학교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07년 학교 문을 열었다. 창영초등학교의 전신前身,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는 그렇게 탄생했다.개교 12년 뒤 창영초등학교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서슬 퍼런 대일항쟁기, 학생들은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한다. 곧바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학생들은 교실이 아닌 거리로 나가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는 인천 만세 운동의 시작이자, 독립을 향한 외침이 인천 전역으로 퍼지는 기폭제였다. 교육을 통해 희망을 찾고자 했던 당시 조선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자부심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창영초등학교에는 3·1운동 100주년 기
2020-06-02 2020년 6월호 -
인천의 아침-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A변호사를 만난 건 2014년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는 고려대 2학년 학생이었다. 미 해병대를 지원, 육군 중위로 입대한 그는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같은 배에 올라 통역을 맡았다고 했다. 그가 인천에 온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앞에 세우는 한국전쟁기념비에 쓸 돌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만석부두(레드 비치)에서 가져간 돌은 2016년 8월 샌프란시스코 프리시디오 국립공원 한국전쟁기념비로 태어났다. 만석부두와 월미도 일대를 함께 도는 동안 슬픔과 감격이 교차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지금도 선연하다.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월미도(그린 비치). 구축함의 함포 사격과 항공기의 폭격을 업고 맥아더는 상륙에 성공한다. 3일 만인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광장에서 표양문 임시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릴 정도로 유엔군의 탈환은 신속했다. 남한 땅의 90%가 북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개시 13일 만에 서울을 수복하며 6·25전쟁의 판세를 바꿔놓는다. 9월 10일 네이팜탄 폭격을 시작으로, 작전 전개 과정에서 월미도는 65회에 이르는 항공기 폭격을 받아 섬 전체가 벌집처럼 변한다. 1995년 인터뷰한 한 참전자는 “섬의 형태를 몰라볼 정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월미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때는 병자호란(1636) 이후다. 청나라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1656년 월미도에 국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을 설치한다. 유사시 월미도로 피신했다 영종도를 경유,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19세기 후반 월미도는 국제 사건의 무대가 된다.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
2020-06-02 2020년 6월호 -
인천지명, 인천소사
인천지명어을미도, 얼미도에서 월미도月尾島흔히 월미도라는 이름의 유래를 ‘섬의 생김새가 반달月의 꼬리尾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서’라고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곤 한다. 사실 월미도의 뜻풀이는 생김새보다는 언어학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한결 타당하다. 이나 등 옛 자료에 그 단서가 있다. 이를 통해 과거 월미도가 ‘어을미도’ 또는 ‘얼미도’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어을於乙’은 우리말 ‘얼’을 한자로 풀어쓴 것이니, 결국 월미도의 이전 이름은 ‘얼미도’였던 셈이다. ‘얼-’은 우리 중세어 ‘얼다’의 어간이다. ‘얼다’는 한데 섞이다, 어우러지다, 혼인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미’는 물水을 말한다. 물은 우리 옛말에서 ‘믈’ 또는 ‘미, 매, 메’ 등으로도 쓰였다. 그것이 17세기 이후 ‘물’로 고정되어 이어져온 것이다. 물을 ‘미’로 발음했었다는 사실은 미역, 미나리, 미더덕, 미꾸라지, 미끌미끌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얼미도’란 ‘물(미)이 섞이는(얼) 섬’이라는 뜻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육지와 가까운 곳에 있고, 바닷물이 들어오고 빠질 때마다 섬을 타고 돌면서 섞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을 것이다. 얼미도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월미도’로 바뀌어 쓰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차츰 월미도가 얼미도를 밀어내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월미도’라는 이름이 생기자 ‘달月’이라는 좋은 뜻을 가진 글자를 갖다 붙여 지금의 한자 이름이 생기게 됐다. 우리말 땅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좀 더 좋은 뜻의 글자를 갖다 붙이는 일은 흔하다. 이를 ‘가자표현佳字表現’이라 한다. 덕분에
2020-06-02 202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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