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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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캠프 마켓
굿모닝, 캠프 마켓 초콜릿색 소스를 듬뿍 얹은 스테이크를 부평 캠프 마켓에서 맛보았던 때는 1990년대 초반이었다. 넓적하고 두툼한 고기의 식감이 감동적이었다. 싱싱한 샐러드와 고소한 수프가 스테이크의 품격을 한껏 높여주었다. 출입 카드를 갖고 있던 지인을 따라 캠프 마켓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이후 부평과 신포동 번화가에 있던 경양식집 메뉴가 시시해졌던 기억이 새롭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캠프 마켓에 자주 발걸음을 한 건 취재를 위해서였다. 캠프 마켓 1번 출입구(GATE1) 앞에서 정기적으로 ‘미군 부대 반환’ 집회가 열렸다. 시민단체들은 때때로 인간띠잇기, 걷기대회를 병행하며 끈질기게 반환을 촉구했다. 일명 ‘코끼리부대’라고 불린 오키나와(沖繩) 미군 부대에 갔을 때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군 범죄와 환경오염, 재산권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평에 미군 부대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1945년부터다. 애스컴시티(ASCOM City). 부평에만 ‘시티’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역할이 다른 여러 부대가 혼재하며 ‘하나의 도시’처럼 기능했기 때문이다. 공병대, 통신대, 항공대, 헌병대, 후송 병원까지 갖춘 대규모 기지가 애스컴시티였다. 121후송병원은 시설이 좋아 우리나라 고위 관료들이 치료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부대 규모가 크다 보니 여기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권투선수 홍수환의 모친은 스넥바를 했고, 부평 출신 뮤지션 정유천의 부친은 빵을 만들었다. 이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항공정비사, PX 점원, 구두닦이, 청소부와 같은 군속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인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송도국제경양
2020-01-03 2020년 1월호 -
빈곤의 삶 소복이 덮던, 하얀 밀가루
메이커스, 인천 대한제분빈곤의 삶 소복이 덮던,하얀 밀가루오늘도 당연하게 쓰이는, 무심코 손에 닿는 물건들. 그 누군가가 일터에 틀어박혀 인생을 내어주고 만들어낸 것들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며 인천, 그리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랑스러운 ‘메이커스’를 만난다. 그 첫 번째로 배고픈 시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오늘 우리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대한제분을 찾았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밀가루와 그 재료가 되는 원맥. 대한제분 인천 공장에서.스타일링 진희원1960년대 대한제분 밀가루.곰표에 고래표, 암소표까지….그래서 공장 사람들은 대한제분을 ‘동물농장’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1960년대 제분 공장 인부들이 양곡을 하역하는 모습.살기 위해, 노동자의 삶 속으로1960년대 인천항 부두 하역장, 너저분한 바닥에 원맥이 버려져 널려 있다. 제분 공장 인부들이 그 알알을 움켜쥐고 주머니며 장화 속에 숨겨 넣느라 여념이 없다.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고 내다 팔아 궁핍한 살림에 보탤 수도 있으리라. 그 간절한 마음들이 부둣가 창고의 곡물 언덕처럼 쌓이고 쌓여 산더미가 되어갔다.1920년대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 갯벌을 메운 자리에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일본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 터를 잡았다. 6·25 전쟁을 피해 북에서 온 사람들, 인생 막다른 골목에 선 사람들이 만석동 ‘똥마당’으로 떠밀려왔다. 밤낮으로 꺼지지 않는 공장지대의 불빛은 고단한 삶을 지탱하게 하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공장 노동자의 삶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1921년 일본제분은 만석동 매립지에 근대식 제분 공장을 설립
2020-01-03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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