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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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④ 남촌도림동
노스탤지어 흐르는, 도시의 섬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노희정 화백이 그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섬, 도시의 ‘노스탤지어 ; 그리움’ 남촌도림동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언덕 위의 집 53x33.3cm Watercolor on paper(2000년) 남동구 개발제한구역은 순도 100%의 자연을 품고 있다.흙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언덕 위 낮은 집 그리운 고향 풍경이 펼쳐진다. 공 씨네 모여 사는, 찬 우물 마을봄이 무르익었다. 수산동의 한 농가 비닐하우스에도 작물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토마토가 싹을 틔운 지 이제 두 달. 꽃망울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농부의 마음은 분주하다. 며칠 후 꽃이 피면 벌들을 풀어놓고, 줄기를 바로 세우고, 겹 순도 계속 따줘야 한다. 하지만 땅을 밟고 땀 흘릴수록 생기가 도는 것이 농사꾼 아니던가. “열매를 떠올리면 아무리 일해도 힘들지 않아요.” 햇살 따사로운 오월이면, 귀한 땀방울이 알알이 탐스러운 결실을 맺을 것이다. 공진균(59) 씨는 대대손손 수산동에 뿌리내려 왔다. 주발을 엎어놓은 듯 산이 아담하게 봉긋 솟아 있는 동네. 오래도록 터를 잡고 살기 좋아 수산리壽山里로 불려왔다. 도심 곁인데 냉정冷井, 발촌鉢村, 경신慶信, 능골 등 자연 부락이 아직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나 살고 있는 찬 우물, 냉정 마을은 곡부공씨曲阜孔氏 어촌공파漁村公派의 집성촌이다. “한 가
2021-03-30 2021년 4월호 -
푸른 인천-큰 나무
기다림과 느림의 미학,‘나무’마을 어귀에는 언제나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크고 작은 일들을 지켜본 마을의 큰 어른이었다.사람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 나무 아래에서 마음을 나눴고, 나무는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함께하며 긴 세월을 버텨왔다. 인천에는 우리가 보호하고 가꾸고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줄 의미 있고 아름다운 옹골찬 큰 나무들이 많다. 최근 장수동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의미 삼아 인천의 큰 나무들을 돌아봤다.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오인영 미추홀구사진인연합 회장도움 이루다 푸른인천가꾸기운동시민협의회 총괄이사, 숲&인 연구소 대표부평초등학교 은행나무계양구 부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6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평도호부관아의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풍치목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시대 배움의 장소에 이어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고 자라는 역사의 현장을 모두 한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루다 숲&인 연구소 대표는 “은행나무가 학교 안에 있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다. 아마 학교 밖에 있었으면 개발의 현장에서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지금도 의미 있는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높이 25m, 둘레 10m, 수령 약 600년계양구 어사대로 20장수동 은행나무노거수 앞에서는 풍요로운 가을의 색깔을 볼 수 있다. 가을이 무르익으면, 은행나무는 황금색 폭죽을 터뜨린다. 가지마다 무수히 달린 노란색 리본은, 그렇게 결실의 가을을 축하한다. 누군가의 희망을 바라는 일이 있을 때
2021-03-30 2021년 4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⑪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세계 최고 기술인의 이름으로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한 번째 등굣길의 종착지는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다. 봄볕 내려앉은 교정, 계절을 닮은 따스한 정이 흐르는 그 길을 김창율 교장 선생님(35회 졸업)과 이찬용 총동문회장(38회 졸업), 김기춘 동문장학회장(34회 졸업)이 나란히 걸었다.※ 본 취재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준수해 진행했습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이찬용 총동문회장이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 새겨진 기념탑 앞에 섰다. 그 문구처럼,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지역과 국가 발전의 기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대한민국 기술 사관학교‘세계 최고 기술인의 요람’. 학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붙은 문구는 이루고픈 목표나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다. 오늘날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이하 인천기공)를 가장 잘 설명하는 객관적인 수식어다. 인천기공은 세계 최고의 기술인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다. 국제기능올림픽위원회가 담보한다. 위원회는 전 세계에서 국제기능올림픽 메달을 가장 많이 획득한 교육기관을 조사했다. 대한민국 인천의 인천기공이었다.“무려 42개입니다.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왕중왕이 되어야만 국제기능올림픽 출전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전 자체도 쉽지 않은데 메달까지 땄다는 건 그야말로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인천기공은 1940년 5월 10일 인천공립직업학교로 개교했다. 지난해에는 역사적인 80주년을 맞았다. 성장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76년 현재의 교
2021-03-30 2021년 4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④ 전등사
보물 등 문화재 21점 품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찰2021년 봄 전등사 대웅보전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傳燈寺는 삼국시대인 381년 아도화상이 지금의 자리에 진종사眞宗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이후 1,600여 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찰’로 빛나고 있다. 전등사로 이름을 바꾼 때는 1282년 고려 충렬왕(25대)의 비인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하면서부터다. 궁주는 몽골에 볼모로 끌려간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며 옥등과 함께 대장경을 봉안한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웅전(보물 제178호)을 비롯해 약사전(보물 제179호), 철종(보물 제393호) 등 전등사는 보물만 6점을 품고 있다. 여기에 사적 1점과 현왕탱(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3호), 법화경판(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5호) 등 시 유형문화재 7점, 유형문화재 자료 3점, 인천시기념물 3점, 현충 시설 1점 등 무려 21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보물 사찰’이다. 대웅전은 1605년 절반이 불에 탔던 것을 1614~1621년 다시 지은 것이라고 은 전한다. 대웅전의 처마 밑 4개의 기둥 모서리엔 두 손으로 처마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인형들이 있다. 나부상裸婦像이라 불리는 이 인형들엔 ‘슬픈 로맨스’가 깃들어 있다. 대웅전을 짓던 도편수(목수)는 사찰 아래 숙식을 해결하던 주막에서 만난 주모를 사랑하게 되었다. 믿고 사랑한 나머지 전 재산을 맡겼는데, 어느 날 주모가 돈을 몽땅 갖고 도망가자 평생 처마를 떠받치고 살라는 체벌의 의미로 새겼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렇지만 나부상의 표정이 익살스러워 원숭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전등사를 오
2021-03-30 2021년 4월호 -
그 옛날 인공적으로 파낸 ‘굴포천’
그 옛날 인공적으로 파낸 ‘굴포천’‘굴포천’은 한강 하류부에 위치한 한강의 제1지류로, 부평구 일신동 철마산에서 발원해 부평 도심지의 공장 지대를 지나 부천을 거쳐 김포 신곡동 신곡 양·배수장에 이르는 인천에서 가장 긴 지방 하천이다. 인천의 지방 하천인 청천천과 계산천, 귤현천, 갈산천과 함께 실개천인 세월천, 목수천, 산곡천, 구산천 등이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굴포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동부간선수로와 서쪽에는 서부간선수로가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다. ‘굴포掘浦’라는 말은 ‘판 개울’을 한문으로 표현한 말로, 인공으로 팠다는 의미가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옛날 삼남 지방에서는 정부에 바치는 곡물(삼남미)을 바다를 통해 강화 손돌목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용산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손돌목이라는 곳이 바다 밑에 사슴뿔 같은 암초가 많아 배들이 자주 조난을 당했다고 한다. 고려 고종 때 최충현의 아들 최이라는 사람이 이 위험한 손돌목을 피하기 위해 부평 만월산 칠성약수터에서 발원해 부평벌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흐르던 하천을 개조하고, 제물포 쪽과 연결해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 개설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00년 뒤인 조선 중종 때에도 김안로라는 사람이 과거 최이의 계획대로 하천을 파기 시작했지만, 원통이고개를 뚫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때 뚫지 못한 곳이 간석이고, 파낸 하천이 지금의 굴포천으로, 당시의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옛날 인공으로 파낸 굴포천은 한때 붉어졌던 환경오염 문제를 딛고, 현재 인천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우리 시는 지속적인 재생 사업을 통해 굴포천을 인천 대표
2021-03-30 2021년 4월호 -
포토 에세이-천연기념물 제562호 장수동 은행나무
장수동엔 800살 먹은 할아버지가 계십니다.한자리에 뿌리내리고 8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입니다.봄엔 첫사랑 같은 연둣빛 이파리로, 가을이면 금관의 장식 같은 샛노란 잎으로나무는 사계절 내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높이 28.2m, 둘레 9.1m. 이 은행나무의 크기만 봐도 얼마나 오랜 세월을 지내왔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고려 시대, 조선 시대 선조들도 이 나무에 당제를 지내고 그늘에서 쉬어가셨겠지요. 이 거목 역시 800년 전 어느 고려인의 작은 소망과 함께 묘목으로 심어졌을 것입니다.4월 5일 식목일에 심는 나무 한 그루가 800년 뒤, 1,000년 뒤 큰 나무로 성장하길 소망합니다. 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남동구청
2021-03-30 2021년 4월호 -
인천의 아침-개관 75주년, 인천시립박물관 가는 길
개관 75주년, 인천시립박물관 가는 길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1946년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개관한 인천시립박물관의 현재 모습. 사진 왼쪽은 우현 고유섭 동상이고 가운데 열차는 1969년 제작한 협궤열차다.석남 이경성 흉상헌칠한 키에 잘생긴 28세의 청년은 1945년 8월 15일 광복하자마자 인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청년은 부평 조병창에서 중국 철제 종을 실어 오는가 하면 매머드 상아, 자기 파편 등 인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유물들을 그러모았다. 개미처럼 수집한 유물은 송학동 세창양행(현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자리) 사택에 보관했다. 그해 10월 3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을 세우며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청년 이경성李慶成(1919~2009)은 이듬해 4월 1일 세창양행 사택에서 정식 개관식을 갖는다. 좌우익의 갈등과 불안한 치안.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 박물관 개관은 석남石南 이경성의 애향심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물관은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1950년 6월 27일부터 무기한 휴관에 들어간다. 석남은 이때 36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인근 방공호와 창고로 대피시킨다. 선견지명.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 전개와 함께 박물관은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다. 석남이 숨겨뒀던 유물들은 1953년 4월 1일 새롭게 개관한 제물포구락부로 옮겨진다. 이후 37년간 한자리를 지키던 박물관이 지금의 청량산 자락으로 이전한 때는 1990년 5월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이후 석남과 같은 개방형 관장 체제를 중심으로 몇 차례 굵직한 도약의 시기를 지나온다. 첫 도약은 2006년 리모델링 뒤 재개관을 했을 때다. 이때 전시실과 수장고
2021-03-30 202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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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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