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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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 ⑧ 연안부두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그리운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가슴에 그리움 스미는 ‘연안부두’. 한복순 화백이 그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연오랑 등대 27x21(cm) 혼합 재료 2021 역무선 부둣가의 빨간 등대. 인천항을 드나드는 배들에게 길을 내어준다.어둠 속 빛을 밝히다 육지와 바다 사이 만남과 이별, 설렘과 그리움. ‘연안부두’, 분주한 바다 정거장과 왁자한 어시장 너머 역무선 부둣가. 방파제 끝자락에 빨간 등대가 오롯이 서 있다. ‘연오랑延烏郞 등대’는 1994년 마지막 날, 처음 불을 밝혔다. 등대는 5초에 한 번 붉은 섬광을 비추며 검은 바다를 지킨다. 하얀, 노란 등대가 가까이 있어 어둠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 꺼져가는 삶에 빛을 밝히는, 등대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구조연합회 인천지역대’의 민간 구조 요원들이다. 단 0.1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대원들은 구조 요청이 오면 바로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부둣가에 머문다. 낡은 컨테이너 두 동을 이어붙인 초라한 공간이 영웅들의 아지트다. 구조 장비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밀실, 벽면 한쪽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로부터 받은 표창장이 빼곡히 걸려 있다. 낡은 액자엔 먼지가 자욱이 쌓여가지만 자부심은 빛난다. “격려 하나로 버티며,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자랑스러워요.”오인성(65) 사무국
2021-07-30 2021년 8월호 -
8·15 광복절 특집 - 독립운동가를 도운 사람들
‘백범 김구’를 도운 독립운동가들, 그들이 머문 그 자리인천은 청년 김창수가 백범 김구로 성장한 곳이다. 세상에 혼자서 되는 일은 없다. 백범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산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옆에서 흙을 퍼 나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며 백범이 광복 후 가장 먼저 인천을 찾은 것도 헌신적으로 자신을 도운 인천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발걸음이었다. 강화도 사람 김주경은 김창수 구명운동을 펼쳤으며 주윤창, 주윤호 형제는 재산을 정리해 독립자금을 대주었다. 객주 박영문은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아들을 옥바라지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내주었다. (저자 이희환)에 나타난 백범 김구를 도운 인물과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백범 김구대명헌은 백범 김구 구명운동을 벌인 김주경의 거처가 있던 자리로 알려졌다. 현재의 한옥은 1928년 황국현이란 부자가 지은 것이다.대명헌은 ‘이야기가 있는 한옥 체험’을 경험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하는 곳이다. 대명헌의 실내 전경대명헌 입구김창수 구명운동 벌인 김주경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1896년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인 김창수는 그해 6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체포돼 인천감리서에 수감된다. 이때 구명운동을 적극 벌인 사람이 강화도 출신 김주경(자字는 경득)이다. 김주경은 강화의 무관으로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김창수의 부모를 번갈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법무대신 한규설을 만나 김창수의 충의를 표창해 석방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재산을 풀어 7~8차례 법부에 소장
2021-07-30 2021년 8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⑮ 부평여자고등학교
정성으로 준비하는 미래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다섯 번째 등굣길을 따라 부평여자고등학교로 간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사제 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 지성至誠을 통해 지성知性을 깨우치며 지성至聖으로 성장하는 그 길을 퇴직 교사 서성만 씨, 정은수 학생회장과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아침 7시. 학생들이 등교하기 한참 전부터 교정을 쓸고 닦는다. 8시가 되면 교통 지도를 나서고, 등교가 마무리되는 8시 40분부터는 교문을 지킨다. 텃밭 관리도 소홀할 수 없다. 부평여자고등학교(이하 부평여고) 배움터 지킴이 서성만(65) 씨, 아니 서성만 선생님의 일상이다. 배움터 지킴이 일을 하기 전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무려 34년이라는 시간을 선생님으로 살았다. 그중 11년을 함께한 곳이 부평여고다. 정년도 이곳에서 마쳤다. 3년 전, 교사 인생의 3분의 1을 함께한 이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고향 논산으로 귀향하려 했지만, 학교가 그를 간곡히 붙잡았다.“부평여고를 거친 선생님들 중에는 초임 시절을 보내고 중견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퇴직 후에도 학교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다. 서성만 전직 교사는 이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대접받기를 바라기보다는 솔선수범했다. 그를 아는 모든 학생과 교사들이 아낌
2021-07-30 2021년 8월호 -
그리운 금강산
그리운 금강산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부슬부슬 초가을비가 내렸다. 2006년 10월 하순. 하객들이 결혼하는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축복의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믿으려 애썼다. 주제넘게 올림포스호텔을 결혼식장으로 잡은 이유는 인천의 빛깔이 선명한 공간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맞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92) 선생은 음악처럼 하모니를 이루며 잘 살기 바란다는 요지의 주례사를 해주셨다. 주례사 말씀에 따라 살아왔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불후의 클래식 명곡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8월 숭의동 논밭에서 탄생했으니 올해로 꼭 60주년이 되었다. 최영섭은 한상억 시인이 준 시를 받아든 그 날 저녁 작곡을 시작해 이튿날 새벽 곡을 완성했다. 당시 인천여상 음악 교사였던 최영섭은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을 바라는 감성으로 작곡을 했다”며 “살던 집이 논밭 한복판에 있어 피아노를 맘 놓고 쳐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 곡은 공중파 방송을 타자마자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킨다. 방송국에 무수한 팬레터가 쇄도했는데, 대중음악이 아닌 클래식 음악에 팬레터가 도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남북 분단의 시대, ‘그리운 금강산’은 북녘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절절한 심정을 잘 그려내며 남북통일의 메타포(은유)를 깔고 있었던 것이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이 노래의 가사 내용 중 세 구절이 수정된다. ‘더럽힌 지 몇몇 해’는 ‘못 가본 지 몇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은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최영섭이 당시
2021-07-30 2021년 8월호 -
소소한 인천사 -인천 지명
무의도, 장수는 춤을 추지 않았다하나개, 큰무리, 실미 등의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중구 무의도舞衣島는 한자를 그대로 해석해 ‘섬의 모양이 장수가 관복(衣)을 입고 춤추는(舞) 모습’이어서 붙은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모습이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같은 설명은 길게 잡아야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일 뿐, 원래 이 섬의 이름은 ‘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지리서라 할 수 있는 이나 는 물론이고,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에도 이 섬의 이름이 무의도無衣島로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1789년 발간된 에는 무의도無依島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이름인 무의도舞衣島는 조선 후기에 나온 에 처음 나타나고, 그 뒤 일제강점기에 만든 여러 지도나 지지地誌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쓰였다. 무슨 이유에서 이처럼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면에서 볼 때 ‘옷 입고 춤추는 모습’이라는 의미는 누군가 뒤늦게 한자의 뜻을 풀어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결국 무의도의 어원은 분명치 않은데, 연구자들 가운데는 ‘무의’가 우리말 ‘무리’나 ‘물’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소리만 따서 붙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마을이 크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무의도는 지금도 흔히 ‘큰무리’라 불리며, 소무의도는 ‘떼무리’나 ‘뙤무리’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때의 ‘무리’를 한자로 옮겨 쓴 것이 ‘무의’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여기서 ‘무리’는 섬사람들이나 어부들이 흔히 바닷물의 흐름과 관련해 쓰는 말 ‘물’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인천 소사1960. 08. 22 자유공원 연오정 건립자유공원 하
2021-07-30 2021년 8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⑧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언덕 위, 종교와 인술仁術의 하모니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2021년 7월 인천내동교회중구 ‘신포문화의 거리’에서 내동 방면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옥탑방 같은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를 인 아담한 교회 건물을 만난다.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 중구 개항로45번길 21-32)는 중세 유럽의 풍광을 연상시키는 로마네스크 석조 건물이다.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면 왼편 화단 위로 두 개의 흉상이 이방인을 맞는다. 하나는 고요한(영국 해군 종군 신부 Charles John Corfe의 한국 이름) 주교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성공회 인천지역 최초의 선교사 랜디스(Eli Barr Landis)이다. 그 옆으로 英國病院(영국병원)이라 새긴 돌비석이 눈에 들어온다.186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1888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랜디스는 고요한 주교와 함께 1890년 제물포 땅을 밟는다. 랜디스는 이듬 해 10월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영국병원’을 교회 안에 세운다. 중세 유럽풍의 인천내동교회를 건축하면서 10명이 동시에 입원할 수 있는 ‘성누가병원’을 함께 지었던 것이다. 열정 넘치는 선교사이자 실력 있는 젊은 의사였던 랜디스는 영국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성심껏 치료해 준다. 조선인들이 랜디스를 ‘치료를 잘해주는 큰 사람’이란 의미의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랜디스가 33세 되던 해 장티푸스에 걸려 눈을 감으며 병원은 문을 닫는다. 진료를 재개한 때는 6년만인 1904년 영국인 의사 위어Weir 박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러일전쟁 당시엔 부상을 당한 러시아 선원들이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16년 다시 셔터가 내
2021-07-30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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