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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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터뷰-장수동 은행나무, 850년의 대화
850년간 한자리에서 지켜본 인천은…“한반도의 중심에서 세계의 중심 도시로” “850년간 내가 지켜본 인천은 늘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면 온몸으로 외침을 막아냈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내보내며 한반도의 인후 역할을 해왔지. 암, 그렇고말고.”올해 850살을 먹은 장수동 은행나무는 “인천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목구멍이라 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책임을 잘 수행한 도시”라며 “인구 300만에 세계적 공항과 항만을 가진 인천은 이제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수동 은행나무는 전국의 800살 이상 된 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로 손꼽힌다. 원형을 잘 간직한 데다, 무성한 가지와 잎이 버들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높이 28.2m, 근원둘레(지표 경계부 둘레) 9.1m, 수관樹冠(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의 폭 동서 27.1m, 남북 31.2m의 외양. 장수동 은행나무가 지난 2월에서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62호’로 지정된 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한자리에 뿌리박혀 인천 땅에서 살아온 장수동 은행나무가 바라보는 고향 인천은 어떤 도시일까. 가을에 만난 장수동 은행나무(이하 장은나무)는 서서히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고려 때부터 장수동에 뿌리내리고, 인천 사람들의 삶과 우리나라 역사 지켜봐“돌아보니 나도 참 많은 사건을 겪었구나. 태어나던 시기 고려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이 쳐들어왔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조용한 시기도 있긴 했어.” 가을 아침, 장은나무 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이 바람
2021-11-01 2021년 11월호 -
스케치에 비친 인천 - 덕적도
가을보다 짙고, 바다보다 깊은 ‘큰물’‘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큰물’ 덕적도의 가을을 유사랑 시사만평가가 그렸다. 깊고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그림으로.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덕적도 갈대숲 210 x 297(mm) 커피 그림 2021섬 북쪽 능동자갈마당 가까이에 있는, 서해 최대의 갈대 군락지. 가을이면, 은빛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아름다운 섬, 빛나는 사람들 시월인데 날이 차다. 느닷없이 부는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지만 섬 바닷가엔 도시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포근함이 공기 사이를 맴돈다. 덕적도 바다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진리해변,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덕적초·중·고등학교. 고른 한낮이 지나고,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까르르 햇살 같은 웃음소리를 퍼트리며 학생들이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다. 발걸음도 거분거분히 노란 버스에 오른다. 그렇게 구불구불 섬길 따라 다다른 섬 북쪽 끝자락. 능동자갈마당에 조금 못 이른 북2리 마을. 눈앞에 거대한 은빛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서해에서 가장 큰 갈대 군락지다. “갈대는 덕적도 정신이에요. 혼자선 흔들리지만 함께하면 무너지지 않지요. 우리 섬사람들은 예로부터 갈대처럼 잘 뭉쳤어요. 여러분은 덕적도의 미래예요. 그 뜻을 품고 더불어 살아가길 바랍니다.”권순학(58) 덕적중학교 교사는 덕적도의 힘을 ‘단합
2021-11-01 2021년 11월호 -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육으로 신명나다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여덟 번째 등굣길을 따라 간석동 골목길을 오른다. 50년 전, 만월산 자락에 터를 잡고 명문의 탄생을 알렸던 신명여자고등학교. 학생 간의 우애와 사제 간의 예의, 견고한 뿌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그 길을 김은주 동문(2회 졸업), 원나영(18) 학생과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학교를 닮은 삶, 학교를 위한 삶가을을 닮은 탐스러운 꽃을 든 여성이 학교로 들어선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교문은 그 시절 그대로다. 학교 본관까지 이어지는 소향로를 천천히 걸어 본관에 다다르자 한 중년 남성이 그녀를 맞이한다. 손에 든 꽃다발을 건넨다. 맞잡은 두 손에 진한 추억이 배어 있다. 주인공은 김은주(63) 동문과 김주한(59) 교장이다. 1989년 3월 1일, 대학을 갓 졸업한 김주한 교장은 신명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김은주 동문은 학교 총동창회 동문회장이었다. 그들은 십수 년이 넘는 세월을 학교 발전을 위해 함께 애썼다. 김은주 동문이 22년간의 동문회장 역할을 마치고 숨고르기에 들어간 사이, 그 옛날 초임 교사는 교장으로 취임했다.“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마음에 꽃다발을 준비했습니다. 그동안 학교를 위해 헌신했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라 생각해요.”‘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한다.’ 졸업한 지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김은주 동문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예의를 중시했던 학풍은 지금까지도 선후배 간, 사제 간의 정을 두텁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1973년
2021-11-01 2021년 11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⑪ 인천도호부관아
문학산 아래서 인천 다스리던 관청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2021년 10월 인천도호부관아인천문학초등학교(미추홀구 매소홀로 553) 교문을 지나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펜스 안에 있는 건축물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이루는 ‘맞배지붕’과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위에 짜임새(공포)를 받친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한 이 건축물은 인천도호부관아(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호)의 일부이다. 인천도호부관아는 말하자면 지금의 시청이다. 인천도호부관아를 언제 건립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전기 문신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는 1424년(세종 6년) 객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객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지붕의 기와엔 ‘강희 16년’이라고 새겨져 있어 숙종 3년(1677)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불전쟁(병인양요, 1866), 조미전쟁(신미양요, 1871)을 치른 이후 1871년 기록엔 ‘향청 13칸이 무너져 단지 4칸만 남아 있고, 군관청 7칸이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1899년 는 그러나 객사 20칸, 동헌 10칸, 내동헌, 어용청, 수미고, 군기고 등 원래의 규모를 밝히고 있어 어느 시점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인천도호부의 건물 대부분은 또다시 불에 타거나 헐리고 객사 일부와 동헌 건물 두 채만 남아 인천문학초등학교를 세울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예를 올리거나 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한 곳이며 동헌은 정무를 보던 건물이다. 2016년 문학초등학교 다목적 강당 보수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옛 인천도호부관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축대의 석렬
2021-11-01 2021년 11월호 -
인천 지명-서구의 옛 이름 ‘서곶’
인천 지명서구의 옛 이름 ‘서곶’ 1988년 1월, 북구에서 서구가 떨어져 나와 새로운 구區로 독립했다. 서구라는 이름을 갖게 되기 전에는 흔히 ‘서곶’으로 불렸다. 서곶이란 ‘서쪽에 있는 곶’이라는 뜻이다. 이 일대의 행정 중심지였던 부평을 기준으로 했을 때 서쪽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서구도 인천시 전체로 볼 때는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지만, 북서구가 아니라 서구라고 부른다. 이 역시 북구에서 떨어져 나온 구이고, 지금의 부평과 계양인 북구를 기준으로 보면 서쪽에 있기에 붙인 이름이다. 우리말 땅 이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곶’은 ‘바다나 호수 등을 향해 뾰족하게 내민 땅’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이렇지만 땅 이름에서는 물가뿐 아니라 육지 안에서 ‘산줄기가 길게 뻗어 내려온 곳’에도 종종 ‘곶’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한마디로 ‘길고 삐죽하게 내민 땅’을 곶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串이라 쓰며, 岬(갑)이라는 한자도 곶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곶을 다시 정리하면, 부평 중심지를 기준으로 봤을 때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곶 동네라는 뜻이 된다. 지금은 청라국제도시를 비롯한 대규모 매립 사업으로 모양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원래 서곶은 계양산에서 천마산과 원적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황해 바다를 향해 완만하게 늘어져 내려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곶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쓴 이름이었기에 1988년 서구가 북구에서 독립할 때 ‘서구’가 아니라 ‘서곶구’로 부르자는 의견도 꽤 많았다고 한다. 또한 서구로 이름이 정해진 지 오래인 지금도 서곶초등학교 등의 이름에 남아 여전히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인천 소사2001. 11. 15 영흥대교 개통선재
2021-11-01 2021년 11월호 -
장수동 은행나무 할아버지
장수동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850년 동안,나무는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언제나 한자리를 지켜왔습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는 그렇게 계절마다 다른 그림이 되고 비와 바람, 눈을 피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었습니다.올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장수동 은행나무를 우린 더 자주 찾아가고 더 잘 보살펴야겠습니다.어쩌면 장수동 은행나무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겠지만.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2021-11-01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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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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