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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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호랑이가 산다는 그곳에 가보니
호랑이가 산다는 그곳에 가보니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담국虎談國’이라 했다. 호랑이와 관련한 담론이 넘쳐나는 나라라는 의미다. 육당의 말처럼 우리 설화엔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가 부지기수고, 호랑이가 등장하는 그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호랑이와 관련한 지명만 해도 389개에 이른다. 호구포, 범섬, 인화리 등 인천에도 호랑이 의미를 품은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옛날 이 땅엔 어떤 호랑이가 살았을까.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임인년 설날 즈음해 ‘인천의 호랑이 땅’을 찾아가 봤다.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자유사진가도심 사이 섬처럼 남아있는 호구포대(남동구 논현동).매립으로 소금기 사라진 새 땅엔 공단과 아파트가 들어섰다.바다를 향한 포효, 호구포호구포虎口浦(남동구 논현동)는 이름 그대로 ‘호랑이의 입 모양으로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향토사학자 고故 이훈익(1916~2002년)이 쓴 는 지금의 논현동 근처 호구포를 ‘범아가리’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오봉산 기슭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어 ‘호구암’이라 부르며, 포구에도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호구암이 바다 건너 안산 대부도를 집어삼킬 듯이 응시하고 있어 대부도에서는 개들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신홍순(65) 남동문화원장은 “관련 전설이 여러 개 전해지는데, 원래 호구포의 해안선이 호랑이 아가리 모양이었다. 1879년(고종 16년) 인천도호부의 화도진을 그린 를 보면 호구포 일대의 해안선 모양이 호랑이가 바다를 집어삼킬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라고 설명했다.조선 조정은 인천 앞바다에 이양
2022-02-06 2022년 2월호 -
스케치에 비친 인천-차이나타운
청관淸館, 꺼지지 않는 불꽃‘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굴곡의 역사 속에서 핀 ‘인천 차이나타운’. 청관회 회장인 윤의웅 화백이 그렸다. 그에게 청관淸館은 폐허 속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움이자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그리고 꿈이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청관 폐허의 벽,1972, 종이에 수채, 36.0×54.0cm196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예술의 토양이 척박하던 시절, 오래되고 이국적인 정취가 흐르는 청관은 화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속 장소는 현 한중문화관 뒤편.폐허 속,찬란히 빛나는윤의웅 화백(78)에게 차이나타운에는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한다. 1960년대, 젊은 날의 그는 종이와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중국인 거리로 나섰다.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도시. 아픈 역사가 남긴 ‘폐허’에서 그는 시간의 연속성이 낳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 후로 청관을 찾아가 그리고 또 그렸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에도 낮은 집 지붕 아래 숨어들어 기어코 화판을 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배고프던 시절, 예술의 토양은 더 척박했어요. 고태미古態美와 퇴적미堆積美가 흐르는 청관은 창작 욕구를 쏟아붓게 하는 또 다른 자아이자 안식처였지요.”가난을 넘어 예술가의 삶으로 주저없이 걸어 들어갔다. 자유공원 아래 골목골목엔 속살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남루한 집이 즐비했다. 쏟아지
2022-02-06 2022년 2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⑭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인천개항박물관)
개항기 역사한눈에 볼 수 있는개항박물관으로 꽃 피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르네상스 양식의 돔형 지붕과 화강암으로 마감한 외벽. 인천개항박물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 인천시 중구 신포로 23번길 89)은 한눈에 봐도 견고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다가온다. 좌우 대칭의 이 건물 지붕 한가운데엔 돔을 얹었으며 처마 용마루엔 바로크풍의 장식창이 눈에 띈다. 경사진 지붕엔 본래 기와가 얹혀져 있었으나 지금은 걷어내고 다른 것으로 개조한 상태다. 밤색 아치형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실내 공간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건물의 중앙 돔 양옆으론 ‘도머창’이 나 있고 2층의 창문도 보인다. 언더우드타자기, 낡은 표지의 감리교 찬송가책에서부터 ‘昭和四年(소화4년·1929)’이란 글씨가 찍힌 영화여자보통학교 졸업증서도 눈에 들어온다. 아치와 석조 등 완벽한 서양식 건물인 이 박물관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899년이다. 설계자인 니이노미 다카마사(新家孝正)는 돌과 석재, 시멘트와 목재 등 주재료를 일본에서 들여와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을 완공했다. 일본제1은행은 예금과 대출을 다루는 지금의 은행과는 다른 성격을 띠었다.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빼돌리거나 일본인에게 토지매입자본을 공급하는 것이 일본제1은행의 주 업무였다. 한마디로 조선 수탈의 첨병이라 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이 창립한 1909년 이 건물은 ‘한국은행 인천지점’, 1911년엔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인천 경제를 쥐락펴락한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미군정이 인천에 주둔하던 시기 이 건물은 미군들의 사교장인 ‘댄스홀’로 사용되기도
2022-02-04 2022년 2월호 -
소소한 인천
인천 지명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담긴 백마장 현재 산곡동 일대를 과거에는 백마장이라 불렀다. 아직도 어르신 들은 산곡동 입구보다는 백마장이 더 익숙한데, 그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한자 이름 때문에 백마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그 역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과거 산곡동과 인근의 효성동, 청천동에 국영 목장이 있었고 말을 먹여 기른 곳 이어서 ‘마장馬場’ 또는 그 발음이 조금 변한 ‘마제이’라 부르기는 했으나 백마장은 이와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백마장으로 불려온 산곡동은 원래 조선 말기에 부평군 마장면 산곡리였다. 그 뒤 이곳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 역 개편 때 부천군으로 편입되어 부내면 산곡리가 되었고, 1940년 인천부가 행정구역을 넓힐 때 다시 인천부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시 인천시장 격이던 인천부윤人川府尹 나가이 데라오(永井照雄)가 인천 전 지역의 동洞이나 리里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고쳐 버렸다. 이 과정에서 산곡리에는 백마정白馬町이란 이름이 붙었다.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군대 훈련장이 있어서 백마를 타고 훈련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나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백마장은 광복 이후 우리말로 ‘백마정’이라 했는데, 일본식 행정구 역 명칭인 정町이 장場으로 바뀌면서 오랫동안 백마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인천 소사 1951. 02. 03 제2차 인천상륙작전 개시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중인 1·4후퇴 이후 북한군이 점령했던 인천시에 상륙해 재탈환한 전투를 말한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대한민국 국군 170여 명에 불과했다. 1950년 9월 15일 제1차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 함정 261
2022-02-04 2022년 2월호 -
인천의 아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그라운동장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프로야구에 온 국민이 열광하던 1980년대, 도원동 인천축 구전용경기장의 공식이름은 ‘인천종합운동장’이었다. 도 원동과 숭의동에 걸쳐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부르기 편한대로 ‘도원야구장’ 혹은 ‘공설운동장’으로 불렀다.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등 인천 연고 야구 단인 ‘삼청태’의 경기가 열릴 때면 도원동 일대가 온통 들썩들썩했다. 광성고 뒷산인 ‘모모산’까지 야외관중석으로 변했다. 야구경기를 보려는 광성고 학생들과 입장권이 없는 시민들이 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모모산에 올라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인근 식당들도 덩달아 재미를 봤다. 승리하면 기뻐서, 패하면 아쉬워서 삼삼오오 시정순대, 이화순대, 평양옥 같은 인근 인천 맛집을 찾아 뒤풀이를 하며 야구 얘기꽃을 피웠다. 뜨끈한 순댓국, 해장국에 반주가 한두 잔 들어가면 너도나도 야구 평론가로 변신했다. 논쟁이 격해져 주먹다짐으로 번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당시 인천의 모 국회의 원이 야구장을 찾는 시민들을 위해 도원역 신설을 추진했는데, 동인천역과 너무 가까운 바람에 전동차가 전속력을 내지 못하자 기관사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비사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 운동장이 도원동에 처음 둥지를 튼 때는 1930년대이다. 그때까지 중요한 스포츠 경기는 인천 최초의 종합운동장인 ‘웃터골운동장’(현 제물포고 교정)에서 열렸으나 1934년 도원동에 인천공설운동장을 신설해 이전한 것이다. 1936년엔 관중석 5,000명 규모의 야구장과 400m 트 랙 1만 명 규모의 육상장을 조성한다. 1950~1960년대 인천공설운동장은 ‘그라운동장’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
2022-02-04 202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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