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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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영웅을 만나다
한국전쟁의 영웅을 만나다그들이 있었기에 빛나는 인천, 대한민국우리나라의 인후咽喉 인천. 몽골 침입부터 병인양요, 신미양요, 인천상륙작전, 연평해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의 무대는 항상 인천이었다. 그때마다 목숨을 바쳐 한반도를 지켜낸 순국선열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빛나는 인천을 살아가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도전에 응전해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간 인물과 장소를 찾아갔다.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김영환 참전상이군인은 백석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다.참전용사들이 목숨 걸고 지킨 조국은 세계적인 군사·경제대국이 됐다.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만난 고융희 참전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장.육군첩보부대 HID, 미 극동사령부 산하 켈로 특수부대 소속으로 무수한 전투를 치렀다.“총알이 사람을 피해야지,사람은 총알을 못 피해. 목숨 걸고 싸웠지.”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평화롭게이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아흔살이 된 인천학도의용대 참전용사들. 김태영, 김현생, 임명환(왼쪽부터).1950년 12월 18일, 인천의 남녀 학생 3,000여 명이 전쟁터로 행군했다.목숨 걸고 조국을 수호한 참전용사“개성, 토성, 백마산… 지금도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다 그려져. 그 자리, 가고 싶다고 거기를. 나 죽고 나면 아무도 없어. 지금이라도 시신을 수습해야 해.” 고융희(88) 참전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장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눈물만 쏟아진다. 1951년 8월, 열일곱 살에 육군첩보부대인 HID에 입대해 이북을 수없이 드나든 그다.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서 병력과 민간인 상황을 파악하는 임무였어. 절반 이상은 못 나와. 나도 백마산 옆
2022-05-31 2022년 6월호 -
호국보훈의 달 특집 2 -월미도
월미도, 평화와 전쟁의 길목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눈썹 같은 섬, 월미도. 이 작은 섬에는 굴곡진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불전쟁(병인양요, 1866)을 시작으로 인천에서 일어난 여러 전쟁은 한반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프랑스·미국·일본·러시아 등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삼은 곳은 언제나 월미도였다. 섬이 품은 전장 이야기를 좇아 박경미(50) 역사문화해설사와 월미산에 올랐다.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김대형 포토 디렉터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이 상륙한 월미도의그린 비치(Green beach)해발 108m, 그 아래 거대한 기억“월미도는 전쟁과 이별의 섬,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섬입니다.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해발 108m의 야트막한 산이 얼마나 많은 역사의 밀물과 썰물을 겪었을까.” 월미도 초입, 한국전통정원에서 만난 박 해설사의 월미도 이야기는 첫 마디부터 의미심장했다.한국전통정원 자리는 본래 월미도 사람들의 마을이었고, 1930년대 일제가 꾸민 ‘경인 도시의 오아시스, 지상낙원의 극치’로 가는 길목이었다. 한국전쟁 후엔 미군과 해군2함대가 주둔했으나 그 함대가 1991년 평택으로 이전, 2001년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오늘 우리가 밟고 선 이 땅엔, 작은 연못과 정자가 고즈넉이 펼쳐져 있다. 하늘엔 들뜬 마음으로 놀이동산을 찾은 여행객을 싣고 바다열차가 달린다. 평화로운 봄날 쉼터를 내어주고 정묵하게 서있는 작은 산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월미바다열차. 들뜬 마음으로 놀이동산을 찾은여행객을 싣고 하늘을 달린다.월미공원 초입 한국전통정원. 군부대가 이전하며 지난 2001년 시민에게 개방됐다.49만m2의 너른 땅에 작은 연
2022-05-31 2022년 6월호 -
스케치에 비친 인천 ⑱ 서해 접경지대 강화도 북단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 풍경은 다가오고 다가가는 평화의 땅, 서해 접경지대 강화도 북단을 김푸르나 작가가 담았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전재천 포토 디렉터서늘한 가을이 오자 거칠게 내리는 물결, 2020, 종이에 아크릴 채색 후 디지털 콜라주, 가변 크기건네주었다, 2020, 종이에 아크릴 채색 후 디지털 콜라주, 가변 크기북과 남을 오가는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던, 지금은 사라진 옛 포구와 여전히 경계 없이살아가는 생명의 ‘공존’아, 그리운 가족카메라 앞에 선 그는 혼자다. 하지만 사진 속 그는 가족과 함께다. 1950년 6월25일, 그날 이후 생이별하고 만나지 못한 큰형의 손을 꼭 잡고 있다. 헤어질 당시 스무살이었던 막둥이의 말갛던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파였다. 여섯 형제에게 큰 산과 같던 맏형은 작고 연약해졌다. 세월의 흔적이 더 깊숙이 새겨졌다.곽육규(91) 할아버지는 7년 전, 사진으로 가족을 만났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북에 있는 가족을 합성사진으로 담아낸 ‘마지막 소원’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사진을 붙잡고 한참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몸은 너무 늙어버렸다.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서흥군 신막읍이다. 꼭 3일만 떠나 있다 돌아가려고 했다. 하나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인천에서 부산까지, 낯선 남쪽 땅으로 떠밀려 갔다. 그게 끝이었다. 세월은
2022-05-31 2022년 6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⑱ 팔미도등대
‘인천상륙작전’ 길잡이였던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의 효시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 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9월 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혀라.”1950년 9월, 비밀리에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도쿄(東京) 유엔군총사령부는 한국 부대 ‘켈로(Korea Liasiom Office, KLO)’에 등대 점화 명령을 하달한다. 영흥도를 중심으로 첩보 활동을 벌였던 켈로 부대가 팔미도에 들어가 등대 활용 여부를 보고하자마자 내려진 조치였다.켈로 부대원들은 비밀리에 팔미도에 잠입해 그 시각 등대에 불을 밝혔고, 이튿날 새벽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10만 병력과 대함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다. 이를 계기로 북한군에 밀리던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고,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한 국군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다.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큰 역할을 한 ‘팔미도등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는 인천항에서 15.7km 떨어진 남쪽 섬 팔미도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다. 일제의 강요로 1902년 해관등대국을 설치한 조선 조정이 1903년 6월 팔미도등대를 완공한 이래 바다를 오가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건립 100주년이던 2003년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팔미도에 기념 등대와 조형물을 설치했으며, 현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면 등대탑방·숲·전망대·해변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해돋이와 해맞이도 볼 수 있다.
2022-05-31 2022년 6월호 -
인천 특성화고를 찾아서 ㉕ 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
미래의 관광산업을 이끌 인재가 자라는 자율성장문화학교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의 학교를 찾아서’. 그 스물다섯 번째 등굣길을 따라 동구 창영동으로 발길을 옮긴다. 130년 된 유서 깊은 전통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는 이곳에서는 세계를 무대로 푸른 꿈을 펼칠 미래의 관광인들이 자라고 있다. 호텔경영과 3학년 홍채연(18), 2학년 김다은(17), 외식조리과 2학년 한예원(17) 양과 교정을 거닐며 푸르른 꿈이 어떻게 여물고 있는지 살펴보았다.글 권주희 자유기고가│사진 김범기 자유사진가2학년 김다은 양, 3학년 홍채연 양, 2학년 한예원 양(왼쪽부터)국내 최초, 인천 유일의 관광특성화고등학교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의 시작은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화학당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정착해 여자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소녀매일학교는 영화학당으로 바뀌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기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영화학당을 모태로 한 영화학원은 오랜 시간 인천 지역의 여성 교육을 담당했으며, 1966년에는 영화 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고등학교 최초로 관광과를 신설해 주목받았다. 이후 상업고등학교에서 정보고등학교로 변모, 2012년에는 특성화고등학교로 지정되었고, 2020년에 또 한 번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꾼 것이다.“인천은 예로부터 항구를 통해 서구 문물을 가장 빨리 접했고, 지금은 국제공항이 위치해 글로벌한 도시로 꼽힙니다. 이런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맞는 교
2022-05-31 2022년 6월호 -
소소한 인천
인천지명학이 날개를 펴고 앉았던 것일까?문학산남구 문학-관교-학익동과 연수구 연수-청학동에 걸쳐 있는 문학산文鶴山은 ‘그 모양이 학이 날개를 펴고 앉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등의 옛 문헌에는 ‘남산南山’ 또는 ‘학산鶴山’이라 불린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언제부터 왜 문학산으로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다만 ‘남산’이라는 이름은 옛날 어느 고을에서든 그 고을의 중심 관청官廳을 기준으로 그 앞쪽 또는 남쪽에 있는 산을 그냥 남산이라 부르던 관례를 따른 것이라 추측한다. ‘학산’이라는 이름은 산 모양이 학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말 ‘두룸’에서 파생했다는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주변을 빙 둘러싸다’는 의미의 ‘두르다’가 예전에는 ‘두루다’였고, 여기서 파생된 명사형 ‘두룸’을 ‘두루미’로 발음하다 보니 산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두루미, 다시 말해 학鶴으로 오해해 학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듯하다.인천소사2009. 06. 01인천지하철 1호선 송도국제도시 구간 연장인천지하철 1호선은 인천교통공사의 도시철도 노선으로 그 시작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인천지하철 1호선을 착공했으며 1999년 드디어 박촌역에서 동막역 구간이 개통했다. 그 후 귤현역에서 박촌역 구간이 연장 개통하고, 계양역에서 귤현역 구간이 추가 개통하면서 점차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9년 6월 1일, 동막역에서 국제업무지구역 구간이 개통했다.특히 국제업무지구역을 포함한 송도국제도시 구간은 기존의 계양역에서 동막역에 이르는 구간과는 달리 매립 지반이기 때문에 수명이 100년 이상 확보된
2022-05-31 2022년 6월호 -
인천의 아침-인천세관 140년
인천세관 140년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국가등록문화재 제569호’로 지정된 인천세관 구 창고의 2022년 5월 전경.인천항 제1부두 앞 ‘인천세관역사관’이 문을 연 건 지난해 11월이다. 인천세관은 1911년 ‘구 창고’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역사관으로 꾸미고 그 앞을 공원으로 개방했다. 역사관에선 인천세관이 걸어온 14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인천해관’이란 이름으로 인천세관이 처음 업무를 시작한 때는 1883년 6월 16일. 당시 인천해관의 관할 구역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의 5도에 이르렀다.개항기 세관의 업무는 단순히 관세 부과와 밀수 단속에 그치지 않았다. 항만 수축, 개항지 관리, 토지 경매, 왕실 자금관리부터 한강 수로 답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행정을 집행한 근대적 행정기관이자 작은 정부였던 셈이다.해관 창설 전까지 조선은 7년 정도 일본의 무관세 정책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적 통상외교 경험이 없던 조선이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의 교활한 무관세 무역 시도에 속절없이 당한 것이다. 부산 개항 뒤 비로소 ‘관세자주권’에 눈을 뜬 조선은 일본과 여러 차례 관세 재조정 협상을 시도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무관세 무역 7년의 아픔을 겪은 조선 조정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10~30%의 관세부과징수권을 비로소 인정받는다. 일본은 물론 향후 각국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관세자주권을 확보한 것이다. 조선은 이후 관세 사무에 밝은 독일 출신 외교관 ‘묄렌도르프’를 초청해 인천해관을 관리해 줄 것을 요청한다.그렇게 인천해관엔 영국인 세무사 스트리플링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미국, 청나라,
2022-05-31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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