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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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클로즈업 - 강화도 소창체험관
‘청정 기저귀’부터 ‘최고급 비단옷’까지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강화도는 소창으로 시작한 직물 산업이 크게 번창했던 곳이다. 소창체험관 창문에 소창의 원료인 목화가 매달려 있다.“철컥 철컥 철컥!”기계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자 선녀의 옷자락 같은 하얀 천이 펼쳐져 나온다. 아빠의 손에 들려 면사綿絲 기계를 들여다보는 아이의 눈에 호기심이 넘쳐 흐른다. 무공해 청정 1급의 저 ‘소창’은 곧 갓난아기의 기저귀로, 아름다운 비단으로 세상을 만날 것이다.소창은 면사로 만든 강화의 특산물이다. 목화로 자아낸 실을 평직으로 짠 원단을 가리킨다. 보드라운 질감과 수분흡수율, 항균성이 뛰어나 속옷, 손수건, 배냇저고리, 이불보, 거즈처럼 피부를 감싸주는 직물로 쓰인다. 간혹 ‘무명’이나 ‘무녕’ ‘문영’이라는 말로도 불린다.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393번길 9. 강화 소창체험관이 ‘핫플’로 뜨고 있다. 직조기가 돌아가는 직조시연관, 비단 넥타이 등 소창 제품을 전시한 소창전시관,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소창체험관을 돌아보며 사람들은 ‘낯선 체험’의 한때를 보낸다.강화 직물산업의 한 상징으로 1938년 문을 연 ‘평화직물’이 소창체험관으로 거듭난 시기는 2018년. 2021년엔 소창기념품전시실, 고려의복체험장, 옛날 방직공장 흑백사진과 영상 상영실까지 들어섰다. 과거 크게 흥했던 강화군 직물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공부와 전통문화 체험이 가능하다.소창체험관은 옛 ‘평화직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체험 박물관이다. 소창체험관 입구.강화도는 1916년 강화직물조합이 설립될 정도로 직물산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1910년대 강화도엔 두 집 건
2022-12-02 2022년 12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 명대철제도종
전쟁 무기가 될 뻔했던 ‘평화와 사랑의 종’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인천시립박물관 제공명대철제도종은 17세기 중국에서 제조한 것으로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인천시립박물관(인천 연수구 옥련동) 뒷마당엔 3개의 커다란 종이 3형제처럼 서 있다. 명대철제도종, 송대철제범종, 원대철제범종이 그것이다. 이 무거운 종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1937년 대륙 침략 전쟁을 본격화한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병참기지로 전락한다. 부평에 무기와 군수품을 생산하는 육군조병창이 건설된 시기가 이때이다.일제는 여러 법령을 만들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들을 조달한다. 무엇보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양의 쇠붙이가 필요했던 일본은 1943년 8월 ‘금속회수령’을 제정한다.한국과 중국 각지에서 수많은 금속이 강탈돼 무기 공장으로 옮겨졌다. 숟가락, 동전에서부터 밥그릇까지 조병창엔 온갖 종류의 쇠붙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명대철제도종, 송대철제범종, 원대철제범종도 다른 쇠붙이들과 같은 신세였다.그러나 다행히도 이 종들이 쇳물로 녹여지기 직전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다. 인천시립박물관장이던 이경성 초대 관장은 이때 3개의 종을 박물관으로 옮겨 놓는다.명대철제도종 몸통엔 제작 시기와 장소, 참여한 사람을 알려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은 명나라 숭정11년(1638) 10월 18일 허난성河南省 상추현商丘縣 지역의 태산행궁泰山行宮이라는 도교 사원에 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도종道鍾’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 도교 사원에서 사용됐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불교 사원에서 쓰는 종은 ‘
2022-12-02 2022년 12월호 -
2023 인천시 예산안2022-12-01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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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링 인천 - 인천의 자연, 시민의 색으로 물들다
인천의 자연, 시민의 색으로 물들다 인천은 168개 섬을 비롯한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있습니다.삶에 쉼표를 찍는 여유와 다채로운 매력이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자연.인천 작가의 스케치에 시민 여러분의 색과 빛을 입혀주세요.이달의 드로잉강화도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친구가 강화군 석모도에 살고 있다. 어느 겨울, 그 친구가 생각나 무작정 강화로 발길을 옮겼다. 석모도로 가는 길, 멋진 겨울 풍경을 만났다. 초가집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논과 밭에 하얗게 뒤덮여 있었고, 여기에 검붉게 뒤엉킨 포도 넝쿨이 강렬한 색감을 더했다. 소담한 눈은 마치 한 해 농사를 성실히 일군 농부의 미소처럼 포근했다.김복순 작가서울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30여 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바쁜 일상에도 퇴근 후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붓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명예퇴직을 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상한 바 있으며, 15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국제전 및 단체전 등 다수의 전시를 진행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와 인천미술협회에서 서양화과 이사를 맡고 있으며 국제현대예술협회 인사동사람들 이사, 인천사생회 이사 등을 역임하고 있다.2022년 11월의 시민 작가를 소개합니다!김채린 서구 가정로 유청 부평구 원길로 이재영 연수구 송도문화로 정윤우 미추홀구 용정공원로 정세희 서구 서곶로컬러링 작품을 보내주신 시민께는 추첨을 통해 소정의 상품권을 선물로 드립니다.[‘컬러링 인천’ 보내는 방법]① 우편: 우)21554 인천광역시 남동구 정각로 29 인천광역시청 공보관실 독자마당 담당자 앞② 이메일: goodmorningic2022@naver.com기간: 2022년 12
2022-12-01 2022년 12월호 -
인천의 아침 - 인천 하늘에 비행기 100주년
인천 하늘에 비행기 100주년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민요조 가락의 이 구전가요를 부르던 때는 초등학생 시절인 1970년대였던 것 같다. 반 친구 중 누군가 시작한 것 같은데 아이들은 너도나도 한동안 이 노래를 읊조리고 다녔다. 안창남(1901~1930)과 엄복동(1892~1951)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존감을 높여준 영웅이었다. 안창남은 하늘의 영웅이었고, 엄복동은 대지의 영웅이었다.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인천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1922년 12월 13일 오후 4시43분 인천 상공에 비행기가 나타났고, 난생처음 비행기를 본 사람들은 환호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타고 온 비행기였다. 앞서 오후 4시 23분쯤 인천행 비행에 나선 안창남은 20분 만에 인천 상공에 도착해 저공비행을 하며 ‘공중에서 인천시민에게 고한다’고 쓴 오색 선전지 수천 장을 뿌렸다.비행사가 되기 위해 휘문고보를 중퇴한 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간 안창남은 1921년 비행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다. 이듬해인 1922년 그의 노고를 기리고자 ‘안창남군 고국 방문 후원회’가 비행회를 개최하기로 한다.그해 12월 2일 안창남은 요코하마(横浜)에서 보낸 비행기 ‘금강호’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이를 여의도 항공대로 옮겨 며칠 동안 조립을 한다. 그렇게 12월 8일 서울 시범 비행을 마친 안창남은 9일 인천 방문 계획을 발표한다. 경인선 임시 열차가 증설되고, 기차 요금 할인 같은 이벤트로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다. 인천 사람들은 웃터골운동장에 모여 폭죽까지 터뜨리며 환영할 준비를 했으나 바람이 강해 10일 예정이던 비
2022-12-01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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