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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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사진 이야기-녹색의 계절에
녹색의 계절에관곡지, 2020온 천지가 녹색으로 덮여 있다. 색에 민감해진 것은 사진을 시작하고부터다. ‘색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병든 사람마저 치유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색에 집중하게 되었다. 더욱이 사진가는 색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이 땅에서 색은 사계절로 분류하고, 계절마다 색이 다르다. 언젠가 신문에서 ‘녹색을 자주 보면 눈이 좋아진다’는 기사를 본 후 녹색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었다. 녹색 중에서도 연초록은 바라보기만 해도 상큼하며 눈이 시원하다. 녹색은 평화·편안함·자연·조화 등의 이미지가 있으며,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그런 녹색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색을 찍고 싶은 것이다. 눈이 극도로 나빠진 분이 내 사진을 보고 조금이라도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을 사진에 담으려고 한다.글·사진 최병관 사진가
2023-08-02 2023년 8월호 -
8·15 광복절 특집-인천, 호국 보훈의 현장
“대한 독립 만세! 인천 사람 만세!”1945년 8월 15일. 인천 곳곳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인천창영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인천의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강화도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8·15광복은 처절한 독립운동의 결과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우리 민족은 국내는 물론 만주, 하와이 같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마침내 8월 15일,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다. 싸워서 쟁취한 결과였다. 우리가 그날을 해방절이라 부르지 않고 ‘광복절’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인천은 훨씬 이전부터 위기 때마다 나라를 지켜낸 땅이었다. ‘광복 78주년’을 맞아 ‘인천 호국 보훈의 현장’을 찾아갔다.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홍승훈 포토그래퍼1919년 4월 2일 만오 홍진이 ‘13도대표자회의’를 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 자유공원. 13도대표자회의는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공원의 상징인 맥아더 장군 동상이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 인천항을 바라보고 있다.‘상하이임시정부’의 모태‘한성임시정부’의 탄생지 자유공원장맛비에 촉촉이 젖은 땅을 밟으며 자유공원을 오른다. 물기 머금은 풀나무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중구청 뒤 ‘연오정’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노인, 하얀 털로 뒤덮인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산책하는 여인. 자유공원 산책로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롭기만 하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는 자유공원 광장. 그 많던 비둘기들은 어디로 간 걸까.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광장 한편에 걸린 플래카드가 비둘기가 사라진 이유
2023-08-02 2023년 8월호 -
골목길 TMI ⑭ 옥련동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 호에는 옛 송도역에서 송도유원지까지 추억을 따라 걸었다. 매립으로 소금기 가신 새 땅에는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짭조름한 삶이 흐르고 있었다.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그래퍼수도권 지하철 송도역을 출발하는 열차철길이 남긴 추억협궤열차의 기적 소리에 새벽잠 털어낸 발걸음 소리 가득했었던, 이슬도 채 마르지 않은 어스름 송도의 5일 장터. 어느덧 뉘 좌판에선 마수걸이 흥정이 시작되고, 일면식 없는 인연이어도 먼우금 갯벌마냥 노동으로 갈라진 손금 하나로 마음이 열리곤 했었다.- 1973년 남인천에서 송도 구간이 끊기면서 옛 송도역은 수인선의 종착역이 됐다. 그 시절 송도역 앞은 안산, 시흥, 군자 등에서 건너온 촌로와 다라이를 인 아낙들이 곡식과 생선을 펴고 흥정을 벌여 늘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수인선이 폐선하면서 이 모습은 사라졌다. 길 건너 대로변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상인들은 건물 뒤편으로 밀려나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 현재의 송도역전시장이다.2대째 ‘역전쌀상회’를 운영하는 임동환(66) 상인회 회장은 옥련동 일대가 북적이던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다. 어머니는 역전 장마당(반짝시장)에서 노점을 했다. 수인선 따라 보따리 상인들이 이고 오는 미곡을 도매로 매입해 장사를 했다. 역전시장으로 자리를 옮기고도 오래된 단골들 덕분에 꽤 북적였는데, 이제 시대가 변했다.“1990년대까지 시장 골목에 사람이 바글바글했어요. 여름이면
2023-08-02 2023년 8월호 -
인천의 아침-칼럼
광복 78주년, 호국 보훈의 도시 인천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791년 전, 인천에 강도江都란 도시가 있었다. ‘고려의 수도’ 강화도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1232년 몽골이 침입하자 고려왕조는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강화로 도읍을 옮긴다. 몽골제국에 맞서 ‘의로운 항전’을 하기 위한 ‘천도’였다. 강화천도 이후 고려는 유럽까지 집어삼킨 골리앗 몽골에 맞서 38년간 처절한 항쟁을 벌인다. 1270년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으며 항쟁은 끝이 났으나, 다른 나라와 달리 고려는 복식 등 모든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다.인천 강화도가 전시戰時 수도首都로 38년간 고려를 지켜낸 이래, 인천은 ‘호국 보훈의 도시’ 역사를 도도하게 써내려 왔다. 왜란, 호란이 발발한 16~17세기 인천은 왕실의 보장지처保障之處 역할을 했다. 청나라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1656년 월미도에 국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을 설치했는데, 유사시 월미도로 피신한 뒤 영종도를 경유해 강화도a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서구 열강이 밀려오던 19세기, 병인·신미양요가 발발했을 땐 격렬하게 싸워 나라를 지켜낸 것도 인천이었다. 병인양요(1866) 때는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쫓아냈으며,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을 때는 광성보에 배수진을 친 채 최신예 함포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 맹렬히 싸웠다. 무수한 조선 군인들이 순국하는 등 희생은 컸지만 중국과 일본도 해내지 못한 서구 제국주의를 인천은 막아냈다.인천이 늘 전장의 중심이었던 건 지정학적 운명 때문이었다. 인천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 중간지대에 있어 외국에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었다. 육지와 해양을 연결하는 요충지이자 서울로 가는 관문이
2023-08-01 2023년 8월호 -
한 컷 인천-포토 에세이
칠판에 그려진 태극기강화초등학교에 있는 학생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3월 12일.강화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교)에서 독립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교실 안에 있던 학생들은칠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강화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장날이던 3월 18일 강화에선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그들이 부르짖은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갔습니다.만세운동의 기운은 강물처럼 흘러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우리는 광복을 쟁취했습니다.2023년 여름, 강화초등학교 운동장.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만세의 함성처럼 귓전을 울립니다.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2023-08-01 202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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