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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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행복 메시지
하늘·땅·바다의도시 이야기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인천국제공항이 개항을 앞두고 있고, 송도국제도시 매립 공사가 한창이던 시절로 기억한다. 장애물이라고는 흙더미뿐인 곳에서 굴삭기가 거침없이 큰 손을 휘두르고, 덤프트럭이 오가는 동선에 자연스레 길이 나던 게 새로 생긴 땅의 풍경이었다. 그 공사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시오노 나나미)란 책을 접한 것은 그 무렵이다.‘베네치아공화국 1천 년의 메시지’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바다로 나감으로써 삶을 찾은 베네치아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로마제국의 붕괴 후, 중앙아시아의 훈족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왔을 때, 베네치아인들은 난을 피해 바다 가까운 개펄로 이동한다. 이어 사람이 살 수 있는 수상 마을을 건설하고, 다시 그곳을 발판으로 바다로 진출한다. 그리고는 돋보이는 항해 기술과 뛰어난 상업 조직, 잘 정비된 제도 등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베네치아가 주요 교역 상대국에 외교관을 상주시킨 세계 최초의 나라라는 사실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책을 읽으면서 인천과 베네치아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의 빗금 같은 걸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공교롭게도 인천 또한 여의도의 23배 되는 해상 신도시를 만든다는 구상 아래 송도 갯벌을 메우던 중이었다. 한술 더 떠 영종도와 용유도, 두 섬의 남쪽과 북쪽 끝을 방조제로 연결하고 안에 흙을 쏟아 부으며 바다를 육지로 둔갑시키는 공사도 한창이었다.시간이 지날수록 물기 말라가는 새 땅을 보면서 베네치아가 연상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갯벌과 바다 매립을 계기로 인천도 베네치아처럼 영화를 누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
2024-04-23 2024년 4월호 -
내가 사랑하는 인천-신용석 인천개항박물관 명예 관장
사진엽서를 통한인천과 투레트의 가연佳緣글 신용석 인천개항박물관 명예 관장1988년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엽서 전시회 도록지난해 투레트에서 사진엽서 특집호로 발간된 계간지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오페라 극장 인근의 드루오Drouot 거리를 자주 찾았다. 프랑스 최대의 경매장과 우표 수집가들을 위한 크고 작은 우표상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인천중학교 다닐 때부터 우표 수집에 열중하고 있어서 드루오 거리는 취미 생활의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도 드문 세계 각국의 진귀한 우표들이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간혹 오래되고 귀한 한국 우표가 나오면 생활비를 털어서라도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1972년 초였다. 드루오 거리의 유명한 우표상인 필라테리아에 들어가니 낯익은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옛 엽서 한 장을 보여주는 순간 가슴 벅찬 감동이 복받쳐 올랐다.1903년 구한국 우표가 붙은 인천항의 모습을 찍은 사진엽서였다. 프랑스에서 내 고향 인천의 사진엽서를 처음 마주한 후부터 사진엽서 수집은 우표 수집과 함께 또 다른 취미로 자리 잡았고 인천 사랑의 애향심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자유공원에 있던 존스턴 별장과 홍예문거리 그리고 축항과 우체국 건물이 담긴 사진엽서를 영국과 독일의 우표상에서 한두 장씩 발견할 때마다 느끼던 감동은 그 어떤 즐거움과도 비견할 수 없었다. 사진엽서 수집을 시작하면서 유럽에는 많은 수집가들이 있으며 주요 도시에는 엽서 전문상이 자리 잡고 있고 수집가들의 모임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파리 특파원을 역임하는 동안 인천을 위시해 전국 각지의 사진엽서를 40여 매
2024-04-22 2024년 4월호 -
인천은 [ ]다
인천은[ 등대 ] 다글·사진유승현 사진작가‘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어릴 적, 뜻도 모르고 흥얼거렸던 동요 ‘등대지기’ 가사의 마지막 구절이다. 낮에도 밤에도 한 줄기 빛으로 망망대해를 지키는 등대의 일생은 거룩하고 아름답다. 등대가 뿜어내는 섬광을 바라보며 인천을 떠올린다. 최근 수년간 인천을 누비며 많은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느 순간, 인천은 하늘·땅·바다를 모두 품은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와 이어지는 공항, 가능성의 바다를 품은 항만,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원도심과 신도시까지…. 마치 등대와 같이, 인천은 찬란한 빛으로 성공적인 도시 모델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 빛의 끝자락에는 인천의 하늘 아래서, 인천의 바다를 바라보며, 인천의 땅을 딛고 선 1,000만 시민의 행복이 있으리라. 축복과도 같은 하늘과 땅, 바다를 무대로 새로운 길을 열고, 서로의 길을 잇고, 모두의 길이 되는 인천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등대’다.
2024-04-22 2024년 4월호 -
땅 이름 이야기-연수구延壽區
우리가 밟고 선이 땅 위의 이름들글 최재용 연수문화재단 대표이사延壽區네 번째 땅 이름[연수구]연수구는 1995년 인천시가 광역시가 될 때 당시의 남구南區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생긴 구區이다. 그때 연수·청학·동춘·옥련·선학동 등이 떨어져 나왔는데, 그중 가장 컸던 연수동이 구의 이름으로 정해졌다. 이보다 훨씬 전인 구한말 인천부仁川府 시절, 지금의 연수동 지역은 먼우금면에 속한 바닷가 동네였다. 당시 이곳에는 고촌말·솔안말·함박말·머그미 등 여러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1914년 일제日帝가 전국적으로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이들 여러 동네를 합해 ‘연수리延壽里’라는, 전혀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이 광복 뒤에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리里’만 ‘동洞’으로 바뀌어 연수동이 생긴 것이다.‘연수리’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수명이 늘어나는 동네’, 즉 ‘오래 사는 동네’라는 아주 좋은 뜻이다.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있어 날씨가 따뜻하고, 바닷가라서 공기도 맑아 건강에 좋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연수’라는 이름은 이 동네의 환경이나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글자인 ‘壽(목숨 수)’ 자를 갖다 붙여 멋대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인천에서 이렇게 ‘壽’ 자를 넣어 새로 이름을 지은 동네로 남동구의 만수동萬壽洞과 장수동長壽洞이 더 있다. 이 두 곳에도 ‘오래 사는 사람이 많은 동네여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틀린 얘기다. 만수동은, 연수동이 그런 것처럼, 새말·담방리·장승배기 등 여러 동네를 합해 동洞을 만들면서 이전 이
2024-04-22 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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