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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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 ]다2024-05-28 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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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인천-김중미 작가
나의 인천,우리 가족의 인천글 김중미 작가2000년, 작가는 인천 동구 만석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을 펴냈다.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100일 만에 경기 북부에 있는 도시로 이사 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 후 청소년 시기에 인천으로 다시 이사 와 계속 인천 시민으로 살고 있다. 인천 구도심에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스민 곳이 많다. 내가 태어난 곳은 중구 송학동3가 5번지다. 외가는 오랫동안 송학동에서 살았고 친가는 1·4후퇴 때 피란 와 그곳에 자리 잡았다. 송학동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조계 지역이었다. 해방 뒤 일본인이 돌아가고 빈집으로 남은 적산가옥이 한국인에게 불하되었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 1·4후퇴 때 피란 온 친가와 일가친척들은 폭격 맞아 골조만 남은 이와이 병원과 그 근처 적산가옥에 들어가 살았다.우리나라 최초 도선사인 유항렬 도선사에 이은 두 번째 도선사였던 외할아버지는 1·4후퇴 때 유항렬 도선사와 함께 인천항에 있던 배들을 피항시켰다. 그리고 유항렬 도선사가 부산으로 피란 가자 인천에 홀로 남아 날마다 인천항을 오갔다. 부산으로 피란 갔던 엄마가 인천 외할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것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연애를 시작했다. 6년간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이 결혼한 곳은 지금 크라운볼링센터 자리에 있던 낙원예식장이었다. 개항기 때 미국인 월터 타운센드가 한국 최초로 설립한 근대식 정미소 담손이방앗간이 해방 뒤 댄스홀(카바레)로 운영되다가 낙원예식장으로 잠깐 운영되기도 했다. 엄마, 아버지는 현악 3중주단이 웨딩마치를 연주하던 그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친가는 내가 초등학
2024-05-28 2024년 5월호 -
땅 이름 이야기-부평富平·부평구富平區
우리가 밟고 선이 땅 위의 이름들글 최재용 연수문화재단 대표이사다섯 번째 땅 이름[부평·부평구]인천의 ‘부평’이라는 이름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10년, 길주목吉州牧이 부평부富平府로 바뀜으로써 생겼다. 대개는 이 ‘부평’을 넓은 곡창지대여서 ‘수확이 많은 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동네는 먼 옛날부터 일제日帝 강점기 초반까지도 곳곳에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던 곳이니, 풍요로운 평야였다고 볼 수는 없다.1656년에 나온 등 여러 옛 자료들을 보면 이곳 부평에 대해 “삼면三面이 모두 물이며, 낮고 막혀 통하지 않는 땅”이라는 표현이나, 바닷물을 막기 위해 만든 방죽 이름이 여럿 나온다. 주요 산물産物도 소금·조기·낙지 등이 나올 뿐, 쌀이나 곡식은 적혀 있지 않다. 따라서 고려 충선왕 시대에 이곳이 풍요로운 농경지였다고 볼 수는 없으니, ‘부평’도 ‘풍요로운 들판’이라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부평이 상습 침수지를 벗어나 안정적으로 곡식을 생산하게 된 것은 1923년 쌀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부평수리조합’이 생기고, 이곳에 농사용 물을 대주는 ‘서부간선수로’가 생긴 뒤부터로 본다. 따라서 부평의 뜻은 언어학적 입장에서 따져봐야 할 것인데, 지리지에 나오는 다음 내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부평군은 본래 고구려의 부여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김화현이다.(富平郡 本高句麗夫如郡 景德王改名 今金化縣)”이를 보면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김화군金化郡의 신라시대 이름이 지금의 인천 부평과 똑같은 한자 이름이었다. 그리고 ‘富平郡’이 ‘金化縣’이 됐다고 했으니 ‘富平=金化
2024-05-28 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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