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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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하늘 다른 시간-제물포구락부에서 본 개항장
시선 너머 낯선, 개항장1883년 1월 1일, 제물포항이 열리면서 세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신문물이 쏟아지고 파란 눈의 사람들과 중국인,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개항이었다. 바다 건너온 사람들이 산 좋고 물 좋은 응봉산 자락에 터를 잡으면서, 조선인들은 척박한 배다리 일대로 떠밀려갔다. 다른 나라 양식의 건축물이 여기저기 솟아났다. 그렇게 조용하던 바닷가 마을은 ‘그들만의 세상’이 됐다.그 옛날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인이 바라보던 낯선 세상은, 아픈 역사로 남았다. 하지만 그 시절 개항장 너머로 바라보던 세상은 오늘 끝없이 열려 있다. 그 시선을 따라 긴긴 시간을 가로지르면, 내일 새로운 역사에 닿는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손에 든 옛 사진은, 1904년 난간을 두른 석축 위에서 조선인이 개항장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석축은 제물포구락부의 기단으로 추정되며, 멀리 대불호텔과 월미도가 보인다. 우리 시와 인천관광공사는 지난달 20일부터 개항장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개항장 골목 투어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2020-11-02 2020년 11월호 -
인천의 맛-강화 젓새우
바다에서 보내는 90일 강화 젓새우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 인천의 산과 들에서 자라고, 바다와 갯벌에서 펄떡이고 있을 먹거리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열네 번째는 가을 바다에서 섬처럼 머물며 건져 올린 삶의 희망, 젓새우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망망대해에 섬처럼 떠 있는 운반선‘유신호’의 김칠성 선장섬 아닌 섬, 새우잡이 배˙벌써 두 달째, 새우잡이 배 선장인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강화 석모도 남서쪽과 장봉도 북서쪽 사이에 있는 ‘만도리 어장’. 새우잡이 배는 한번 뱃일을 나가면 보통 몇 달씩 바다에 머문다. 비바람이 불어도 폭풍 경보가 내리지 않는 한, 포구에 닻을 내리는 법이 결코 없다. 잡은 새우를 뭍으로 나르는 운반선만이 세상과 배를 잇는 유일한 통로다. “외로운 건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뭐 하루 이틀 일인가. 격강천리隔江千里야. 육지가 가까이 있으면 뭐해. 새우 다 잡을 때까지는 그저 바라만 보는 거지.”김칠성(65) ‘유신호’ 선장은 30여 년 배를 탔다. ‘부모 잘못 만나서’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먹고살기 위해 어부가 됐다지만, 후회는 없다. 바다 한가운데 버티고 선 끝에, 어엿하게 선장 소리 들으며 내 배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처음엔 남쪽 바다를 누비던 배를 사들여 고쳐 탔다. 배는 오후 9시에 전남 여수에서 출발해, 다음 날 오후 10시가 돼서야 인천 남항으로 들어왔다. 긴 기다림의 시간,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몸뚱이 말고는 가진 것 없
2020-11-02 2020년 11월호 -
인천의 맛 - 젓국 밥상
젓국 밥상깊고 진한 인생의 맛시월, 찬바람이 불면 포구의 밥상엔 활기가 넘친다. 강과 바다가 마주쳐 굽이치는 강화 바다엔 예로부터 새우가 많이 났다. 특히 가을 젓새우의 70%가 강화 출신이다. 젓새우는 추秋젓으로 담가, 김장에 쓰거나 젓국으로 끓여 먹는다. 그 맛은 곰삭을수록 깊고 풍부하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한민족의 역사가 이 한 그릇에 녹아 있다. ‘젓국갈비’는 800여 년 전, 몽골의 말발굽을 피해 강화도로 온 왕에게 진상한 음식이다. 국물 맛을 내는 재료는 오로지 강화도산 새우젓. 맑으면서도 깊고 진한 맛이 난다. 아버지가 바다 한가운데서 새우를 낚아 올리면, 어머니는 사계절 내내 풍성한 밥상을 차렸다. 애호박과 새우젓만 넣고 단출하지만 시원하게 끓인 ‘새우젓국’, 새우를 몇 움큼 집어넣어 노릇노릇 익힌 ‘만 마리 새우부침’. 거기에 특별한 날이면 고려 왕에게 진상했다는 ‘젓국갈비’를 푸짐하게 끓여냈다. 강화도 외포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 이 집 독에는 지난해 가을 담근 새우젓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외포항에서 살이 통통한 햇새우젓을 들여와 천일염으로 다시 버무려 1년 이상 묵힌 것이다. 그 맛은 익히고 삭힐수록 더 감칠맛이 난다. 조건학(66), 김미자(61) 부부는 20여 년을 뜨거운 불솥 옆에서 살아왔다. 오랫동안 직접 기른 돼지며 닭, 오리를 요리해 팔았는데 돈벌이가 시원찮았다. 설상가상으로 고개 너머에 대형 고깃집이 문을 열면서 손님들을 다 빼앗겼다. 조 대표가 버스 기사로 길 위에서 젊음을 보낸 대가에 빚까지 내 어렵게 차린 가게였다. ‘망했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위기는 기회가 됐다. 7년 전 ‘강화도 향토
2020-11-02 2020년 11월호 -
인천 VS 세계 도시-인천 개항장 VS 베트남 하이퐁
인천 VS 세계 도시 ⑧ 인천 개항장 VS 베트남 하이퐁INCHEON OPEN PORT AREA VS HAI PHONG PORT AREA하이퐁과 우리, 그리고 인천1883년, 개항을 통해 대한민국은 근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그 중심에 인천이 있었다. 지난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친 개항장은 당시를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사료적 공간이자, 인천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에도 인천과 같은 역사를 지닌 도시가 있다. 하이퐁H?i Phong이다. 보이지 않는 역사적 끈으로 연결된 하이퐁과 우리, 그리고 인천을 들여다본다.글 윤대영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셔터스톡식민주의 정책 아래 탄생한 베트남의 개항장하이퐁은 베트남에서 수도 하노이Ha N와 호치민H? Chi Minh시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200만 명(2018년 기준)으로 북부에서는 제2의 도시이자 주요 공업 도시이며, 북부 최대의 항만 도시이기도 하다. 남부의 사이공Sai Gon항과 함께 국제적인 해양 도시 하이퐁은 어항 이외에도 무역항과 군항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항만에는 외국 선박이 많이 정박해 있어 항구도시 특유의 활발한 기운이 넘친다. 또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석탄과 쌀 등이 수출되며 해군 기지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면 과연 현재의 하이퐁은 한국에게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대중국 항쟁의 중심지였던 하이퐁은 15세기부터 교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변의 중국뿐만 아니라 서구의 상인들에게도 꽤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적극적인 식민주의 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1874년부터 하이퐁은 ‘개항장’으로 변모되기
2020-10-30 2020년 11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⑥ 인천과학고등학교
인천과학고등학교인천의 인재를 세계의 인재로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여섯 번째 등굣길을 따라 바다 건너 영종도로 향한다. 인천의 인재를 세계의 인재로 키우는 과학 영재 교육의 산실 인천과학고등학교. 백운산 정기 품고 더 큰 미래를 향해 가는 그 길을 이병석 총동문회장(1회 졸업)과 함께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자부심과 추억 서린 과학 인재의 요람다리 건너 세계로 간다. 2001년 3월 공항 개항 이후 영종도는 인천의 섬을 넘어 세계의 하늘을 넘나드는 관문이 됐다. 그보다 7년 앞선 1994년 3월, 공항보다 먼저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탄생한 곳이 있다. 인천과학고등학교는 창조·융합형 과학 인재 양성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품고 백운산 자락에 뿌리내렸다. 창의적인 과학인. 개교 때부터 학교를 지킨 비석을 매만지는 이병석 총동문회장의 감회가 남다르다. 최초의 입학생이자 졸업생인 그는 학교의 역사와 함께한 산증인이기도 하다.“인천과학고등학교는 다른 특수목적고등학교나 자율형사립고등학교와는 달리 인천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학교인 셈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인천 최고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했죠.”모교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중년의 남성도 학교만 오면 10대 시절로 돌아간다. 그의 기억 속 학교는 공부보다 추억이 먼저다. “개교 당시 학교 건물이 다 지어지지 않아 배다리 근처 다른 학교 건물을 빌려 공부했었습니다. 6개월 정도 그렇게 지내다 영
2020-10-30 2020년 11월호 -
몽(夢)땅 인천 Ⅱ
우주의 1년이 담긴 알곡 한 알- 2020년 10월 교동평야코로나19와 싸우는 과정에서도어김없이, 누렇게 벼가 익는 가을이 왔습니다. 세상엔 혼자 되는 일도, 저절로 이뤄지는 일도 없습니다.저 알곡 한 알 한 알에 봄날의 햇살, 여름날의 빗줄기, 뙤약볕에서 살을 태우며 농사를 지은 농부들의 굵은 땀이 담겨 있습니다.무르익어 겸손하게 머리 숙인 알곡들에게 감사합니다 맞인사를 올립니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0-10-30 2020년 11월호 -
인천의 아침-칼럼
훈맹정음, 송암 박두성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 깊은 눈빛과 군더더기 없는 화술, 89세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짝이는 총기. ‘한글 점자’를 창안한 송암松庵 박두성(1888~1963)의 딸 고故 박정희 여사를 만난 때는 2011년 이맘때였다. 연시 한 봉지를 사들고 동구 화평동 냉면골목의 허름한 4층 건물을 찾아갔을 때, 박 여사는 여성 2명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TV에 ‘인천의 그림 할머니’로 소개될 정도로 잘 알려진 화가였다. 송암 선생이 여자로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로 사진에서 본 송암과 닮아 있었다.“아버진 스파르타식 교육자였어. 한 글자라도 빼먹거나 잘못 읽었다간 점자 번역기 아연판을 들어 날 때리는 거야. 처음엔 의붓아버지인 줄 알았다니까.” 철컥철컥. 송암은 여덟 살 딸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자신은 아연판에 점자를 새겼다. 아내에겐 그렇게 제작한 성서 점역을 엮어 책자로 만드는 일을 맡겼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던 장애인 시설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일하며 점자를 연구하고 있으실 때였어. 한번은 제생원에서 함께 일하며 옆집에 살던 네모토 가이조란 일본인이 찾아오더니 그러는 거야. 잡혀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그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내 형편에 애국이니 뭐니 따질 겨를이 없고 정치도 모른다. 나는 다만 맹생(시각 장애인)들이 먹고살려면 점을 치거나 침을 놓거나 해야 하는데 한글 점자가 없어 공부할 수 없으니 점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지.” 박 여사는 생전의 아버지를 ‘위대한 교육가’라기보다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소박한 선생
2020-10-30 2020년 11월호 -
소소한 인천 이야기
소소한 인천 이야기인천 지명갈매기 날던 ‘괭이부리’소설 로 널리 알려진 ‘괭이부리’는 원래 만석동 매립지 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이 괭이부리가 ‘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이 마을의 서쪽에 있는 산이 고양이처럼 생겨서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전 섬이었을 때 이곳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둘 다 근거 자료가 없어 어떤 것이 맞다 잘라 말할 수는 없는데, 이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도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서쪽에 고양이처럼 생겼다는 산은 찾을 수가 없고, 예전에 섬이었으니 갈매기는 날아왔으리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두 번째를 따라야 할 것 같다.괭이부리에서 ‘부리’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벌 또는 벌판을 말하는 우리 옛말로 보는 것이다. 이 단어는 그 뜻이 조금씩 넓어져 나중에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 사는 마을이나 촌락村落을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괭이부리는 ‘괭이(갈매기)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리가 마을이라는 뜻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시 뒤에 마을을 붙여 ‘괭이부리 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와 달리, 새의 부리처럼 가늘고 뾰족한 땅 모양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섬이었을 때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섬의 생김새 때문에 부리라는 말이 붙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래도 만약 이를 받아들인다면 괭이부리 마을은 ‘괭이갈매기가 많이 사는 뾰족하게 생긴 마을’ 또는 ‘(모양이) 괭이갈매기의 부리처럼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인천
2020-10-30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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