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인천고등학교
인천 야구의 역사를 새로 쓰다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일곱 번째 등굣길을 따라 인천 야구 역사에 새로운 금자탑을 쌓은 인천고등학교로 간다. 창단이래 처음으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구도球都 인천’의 자존심을 지킨 인천고를 야구인 임호균(74회 졸업)과 함께 찾았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창단 첫 봉황대기 우승으로 그랜드슬램 달성2020년 11월 2일 서울 목동 야구장. 9회 말 2사 1·2루의 피 말리는 접전 상황에서 서울고 이승한이 타석에 들어섰다. 안타 하나면 동점, 아니 역전까지 가능한 순간. 인천고 윤태현의 투구가 포수 미트를 향해 날카롭게 휘어졌다. ‘땅!’ 배트에 맞은 공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 2루수 노명현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재빨리 2루로 송구했고, 공을 받은 유격수는 다시 1루로 힘차게 공을 뿌렸다. 더블 아웃. 인천고가 제48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2004년 대통령배 이후 16년 만의 전국대회 우승입니다. 무엇보다 봉황대기 첫 우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습니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야구 명문이지만 봉황대기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 한을 이제야 풀었습니다.” 인천고는 1979년과 1996년 봉황대기 결승에 올랐으나 번번이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올 시즌 초반 겪었던 극심한 부진을 극복하고 마침내 2004년 대통령배와 1953, 1954년 청룡기, 1954, 1989년 황금사자기에 이어 2020년 봉황대기까지 ‘그랜드슬램’
2020-12-02 2020년 12월호 -
몽(夢)땅 인천 Ⅱ
반갑다 꼬마열차!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달리던 협궤열차가 이별한 지 25년 만에 귀향했습니다.인천시립박물관이 모셔온 수인선 협궤열차는 1969년 인천공작창에서 제작한 열차로 1995년 수인선 폐선과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열차 안 생선·젓갈 냄새, 참외·오이 향은 사라졌지만 마주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것 같은 정겨운 옛 모습은 그대로입니다.그동안 대전에서 타향살이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고향의 품에 안겨 편안히 쉬길 바랍니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0-12-02 2020년 12월호 -
인천의 아침-구도球都 인천과 야구
구도球都 인천과 야구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제48회 봉황대기 고교야구에서 전국을 제패한 인천고 야구부 ⓒ 시 대변인실탤런트 전노민(본명 전재용)의 꿈은 미국 ‘메이저리그Major League’ 진출이었다. 누구도 못 치는 마구魔球로 거인 같은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을 삼진 아웃시킨 뒤, 관중석에서 흘러나오는 ‘오 마이 갓’ 탄식을 뒤로한 채 유유히 마운드를 벗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재용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도화초등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창영초등학교로 전학하며 야구부원이 된 재용은 남보다 두 배, 세 배 열심히 운동했다. 창영초는 야구 명문교로 졸업생들은 상인천중, 인천고로 진학하는 것이 코스였다. 류현진도 창영초 출신이다. 가난이 문제였다.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먹는 재용과 달걀부침, 장조림을 먹는 동료부원들과의 체력 차이는 컸다. 상인천중 야구부로 진학은 했지만 변변한 지원 없이 ‘헝그리 정신’으로 운동하는 동생을 보다 못한 큰누나의 만류로 재용은 유니폼을 벗는다. ‘메이저리거Major-leaguer’를 꿈꾸던 소년의 꿈은 그렇게 좌절됐다. 2015년 만난 전노민에게서 백말띠, 동갑내기의 유대감과 동시대의 정서가 느껴졌다. 초등학생 전노민이 야구선수를 꿈꾸던 1970년대는 인천고와 동산고가 우리나라 고교야구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기다. 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때는 1905년. 첫 전파자는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였다. 질레트는 이 시기 황성기독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지도했고 사람들은 야구를 타구打毬라 불렀다.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을 주축으로 1911년 결성한 ‘한용단’ 야구단은 경기 때마다 운동장이 터져나갈
2020-12-02 2020년 12월호 -
인천 소사-인천종합어시장 개장
인천 소사1975. 12. 20인천종합어시장 개장치열하게 살아가는 상인들과 싱싱한 해산물을 사기 위해 북적이는 시민들. 365일 활어처럼 펄떡이는 인천종합어시장 풍경이다. 시장은 1975년 12월 20일 문을 열었다. 1974년 11월 공사를 시작한 지 1년여 만이었다. 수도권 수산물 도매 시장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종합어시장의 시작은 1902년 중구 신포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931년 중구 북성동 해안가 매립지로 이전했다가 1975년 중구 항동 연안부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때, 12월의 인천은…1902. 12. 22 제1차 하와이 이민, 인천항 출발1957. 12. 23 동인천역사 준공1993. 12. 03 새얼문화재단 창간 축하회1995. 12. 30 수인선 협궤열차, 수원행 운행을 마지막으로 폐선2001. 12. 02 인천문학경기장 개장(5만256석)2004. 12. 01 인천문화재단 설립2005. 12. 27 인천관광공사 설립2007. 12. 12 인천신항 착공
2020-12-02 2020년 12월호 -
인천 지명-글을 읽는 정자, ‘독정이’
인천 지명 글을 읽는 정자, ‘독정이’용현동 용현사거리에서 주안동과 용현동 경계인 용일사거리 쪽을 향해 올라가는 언덕길을 흔히 독쟁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독정이삼거리’라는 이름이 붙고, 주변 길도 ‘독정이로’라고 해서 공식적으로는 ‘독정이’가 이곳의 이름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쟁이’라고 불렀지 ‘독정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독쟁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 유래를 흔히 “옛날 이 주변에 장독을 만들던 곳이 많이 모여 있어 독쟁이라 부르게 됐다”고 말하는 곳이다. 하지만 독쟁이는 독 만드는 곳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곳에 ‘독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기에 생긴 이름으로 전한다.이곳의 행정 구역은 용현동에 속하는데 용현동은 ‘비랑이’ 또는 ‘비랭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 이름은 비탈 또는 벼랑을 뜻하는 우리 옛말 ‘비사’ 또는 ‘빗’에서 비롯돼 ‘비탈진 곳’ 정도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비랑이는 1906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바꿀 때 비룡리와 독정리로 나뉘었는데, 이 독정리가 바로 독쟁이의 기원이다.‘독정讀亭’은 말 그대로 ‘글을 읽는 정자’라는 뜻인데, 이런 이름을 가진 정자가 있었다고만 할 뿐 언제 어디에 생겼다가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정자의 연유야 어떻든 이 ‘독정’에서 ‘독정리’가 생겼고, 그 발음이 바뀌어 독쟁이가 된 것이다.이와는 달리 우리나라 여러 곳에는 실제로 도자기나 독을 짓던 곳이었다 해서 붙은 땅 이름이 적지 않게 있으며, 이들은 ‘독쟁이’가 아니라 ‘독골’ ‘독곡’ ‘독점’ ‘독점골’ ‘독지골’ ‘독지곡’ ‘독짓골’ 등의 형태를 갖고 있다
2020-12-02 2020년 12월호
- 자료관리담당자
-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