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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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 -노동의 시간
스케치에 비친 인천 -노동의 시간 노동 세상을 움직이고 역사를 바꾼 힘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대한민국을 움직인 인천 노동의 역사. 노동자의 삶을 산 강철 작가가 그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뿌리 깊은 나무 30x22(cm) acrylic on paper 2021인천의 철강산업이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뿌리라고 작가는 말한다.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을 힘차게 움직였을지언정 지금은 퇴색해 가는 동구 공장지대.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돈과 맞바꾼 시간 1983년 8월 31일. 기름때가 스미고 스민 작업 노트 한편엔 아들이 태어난 날짜가 적혀 있다. 그날도 기어이 일했다. 돈을 벌어야 가족이 먹고살지 않겠나. 아내도 당연하게, 오히려 일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이 낡은 수첩엔, 내 삶이 깃들어 있어요. 돈과 바꾼 소중한 나의 시간이….” 이름은 강철(63). 철공 일을 하는 아버지가 쇳덩이처럼 불속에서 더 강하게 살라 지어주셨다. 이름처럼 운명처럼 아버지의 삶을 대물림받았다. ‘ 꽃가루 설거지 비 내려 더 부산한 화요일 / 프레스 발판을 밟을 때마다 / 쇳밥 한 숟가락이 쏙쏙 쌓이고…’ - 김종필의 시 중에서 ‘윙윙~ 끼이익~’ 기계 소리에 귀를 찢기고 ‘쇳밥’을 삼키며 평생을 살았다. 태어난 강원도 속초 바닷가에서 배의 낡은 엔진 고치며, 노동자의 삶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바다가 말라가고 일이 줄면서, 1983년 스물
2021-10-05 2021년 10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⑰ 인천신흥초등학교
찬란한 역사를 새로운 내일로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일곱 번째 등굣길을 따라 중구 답동으로 간다. 계절을 닮은 꿈과 희망이 알알이 영글어가는 인천신흥초등학교. 왕년의 빛나는 영광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며 명문의 뿌리를 지켜가는 그 길을 조각가 고정수 작가(14회 졸업)와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추억의 조각들로 완성되는 하나의 작품 가을 햇살 내려앉은 교정. 한 노신사가 익숙한 듯 교문을 들어선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찾은 학교는 여전히 정겹고 포근하다. 만추를 향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옛 시절을 반추한다. 인천이, 그리고 신흥이 낳은 대한민국 미술계의 거장 고정수(75) 작가가 모교를 찾았다. “건물은 말끔하게 변했지만,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예요. 답동성당도 여전하고. 지금도 학창 시절 기억이 선합니다.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었지요.”집이 있던 신흥3가에서 학교로 오가던 길은 온통 추억투성이다. 학교 근처 만화방도 참 많이 다녔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5,000명의 학생들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 수업을 받고 비좁은 운동장을 달리며 꿈을 키웠다.“당시는 정말 대단했었어요. 학교에 밴드부도 있고 동물원도 있었다니까. 다른 학교에서 엄청 부러워했었지요. 육상부도 유명해 대회만 나갔다 하면 매번 트로피를 안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고정수 작가의 모교 사랑은 각별하다. 국내 최고의 조각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을 모두 학창 시절 얻었다고 여길 정
2021-10-05 2021년 10월호 -
최영섭 악보 인천에 어떻게 오게 됐나
정지연, 한유순 부부의 노력, 인천시립박물관 화답으로 결실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정지연, 한유순 부부가 송도 광원아트홀 정원에서 포즈를 취했다.최영섭 작곡가가 지난 9월 8일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실을 찾았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 정지연 광원건설 회장, 한유순 광원아트홀 이사장, 신희식 사단법인 아침을 여는 사람들 이사장, 우제광 작곡가 운산 최영섭 후원회 대표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최 작곡가는 ‘그리운 금강산’ 수기 악보를 포함해 자신이 전 생애에 걸쳐 작곡한 악보를 모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최 작곡가가 기증을 결심하는 데는 무엇보다 정지연(70) 회장과 한유순(70) 이사장 부부의 공이 컸다. 여기에 유동현(63) 관장의 적극적인 화답으로 귀중한 보물이 인천의 품에 안기게 됐다. 1989년부터 최 작곡가와 교류를 나누어온 인천 출신 정 회장 부부는 지난 2018년부터 1,000여 곡 수기 악보와 파트보를 송도 광원아트홀로 가져와 정리, 전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훗날 전시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었고, 더욱이 악보들이 햇빛과 습기로 손상돼 가고 있었으므로 더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당시 실무 담당자 최진욱 매니저의 손에 습진이 생길 정도로 악보 정리와 스캔 작업은 고된 것이었다. 꼬박 2년 반에 걸쳐 작업을 마친 정 회장 부부는 사람들이 악보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을 만한 인천의 공간을 찾아다니는 한편 최 작곡가에게 기증과 전시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노력을 병행했다. 그러던 중 유동현 관장을 만나 논의를 했고 값진 결실을 보게 됐다.광원아트홀은 정 회장 부부가
2021-10-05 2021년 10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⑩ 인천세관 舊창고와 부속동
밀수 단속, 관세 부과부터 왕실 자금 관리, 기상 관측까지 한‘작은 정부’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2021년 9월 인천세관 구창고 모습. 1911년 지은 건물로 최근 인천세관역사관으로 부활했다.수인선 신포역 2번 출구를 나오자 ‘인·천·세·관·역·사·공·원’이란 글자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글씨 뒤 인천항 방면을 바라보니 고풍스러운 건물 2개 동이 눈에 들어온다. ‘인천세관 구창고와 부속동’이다. 신포동을 등지고 인천항 방면으로 왼쪽 건물은 인천세관 ‘구창고’이고 오른쪽 ㄱ자 건물은 ‘부속동’이다. 창고는 1911년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다. 수인선 공사를 할 때 본래 있던 자리에서 항구 쪽으로 40m 떨어진 곳에 옮겨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현재 내부를 ‘인천세관역사관’으로 꾸미는 중이다. 옆 부속동은 1918년 건축한 것으로 선박 관리 업무를 보던 구‘선거계’와 화물 관리 업무를 보던 구‘화물계’ 사무실이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569호’인 이 건물들은 인천항 개항과 근대 세관·관세 행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항만 유산이다. 인천시와 인천세관은 조만간 인천세관역사공원 개장식을 가질 예정이다.세관은 개항기 중요한 공적 업무를 수행한 관청이다. 당시 세관은 관세 부과와 밀수 단속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행정을 집행한 ‘종합 행정’ 기관이자 ‘작은 정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변변한 행정기관이 없던 시절 인천항의 전반적인 관리에서부터 밀수 사범 체포와 조사, 왕실 자금 관리, 기상 관측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업무를 처리한 것이다.인천세관의 첫 이름은 ‘인천해관’이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인천해관이 함께 문을 연다. 당시 직
2021-10-05 2021년 10월호 -
인천 지명 . 인천 소사
인천 지명가을 하면 ‘소래’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소래라는 이름의 유래를 고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과 관련된 전설에서 찾는다. 신라 무열왕 7년(660) 신라와 중국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와 이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소정방이 왔다’는 뜻에서 소래라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옛 문헌의 기록을 봐도 당시 소정방이 이곳으로 상륙했다는 내용은 없다. 결국 소정방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것은 재미는 있어도 타당성은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소래가 산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뜻하는 우리 옛말 ‘솔’에서 나온 지명이라는 해석도 있다. 소래산이 있으니 그럴듯한 얘기인데, 좀 더 살을 붙여 산과 냇가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솔내’로 불리다 소래가 됐다는 설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래는 이보다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수리’에서 모양이 바뀐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수리봉’처럼 우리나라 산이나 고개 이름에 자주 쓰이는 수리는 사라, 사리, 서리, 소리, 솔, 수락, 술, 시루, 시라 등의 다양한 변형을 갖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소래도 끼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래라는 이름은 결국 순수한 우리말의 변형일 뿐 지금 쓰이는 한자의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셈이 된다. 문헌상으로는 1486년 발간된 이나 1861년 제작된 , 1919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지형도 등에 모두 소래蘇來라고 표시돼 있는데 언제부터 우리말 소래가 이 같은 한자로 쓰이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그것이 언제 어떤 이유로 지금과 같은 소래蘇莢로 쓰이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다.인천소사2009. 10. 16 인천대교 개통서쪽 바다
2021-10-05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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