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더 인천 : 일상 ② 인천의 목욕탕
인천 목욕탕‘더(The) 인천’을 더(More) 알아가다. 지금 발 딛고 선 도시, 살아가는 동네, 그 안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인천 곳곳에 깃든 인천 사람 저마다의 삶과 기억, 숨은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다. 이번 호에는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수증기 자욱한 따뜻한 탕 안에 몸을 담그고 복잡한 세상사는 잠시 잊는다. 뜨끈뜨끈 몸이 데워지고 마음의 온도가 올라간다. 이 순간만큼은 그냥 참 좋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전재천 포토 디렉터※ 내밀한 공간에 사진기와 녹음기를 들이밀어도, 더구나 코로나19 여파와 공공요금 인상으로 힘든 시기인데도 따듯이 맞아주신 목욕업 종사 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계양구 임학동 ‘훼밀리사우나’에서의 망중한모락모락, 굴뚝에서 피어난 역사‘다 ‘때’가 있다.’ 목욕탕 사진집이 있다. 작가는 지금은 사라진 부산의 한 목욕탕을 3년간 기록했다. 탕을 드나드는 사람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태리타월’ 하나로 삶을 부단히도 살아내는 사람들을 벌거숭이로 담았다. 탕 안의 ‘살맛 나는 온도’와 ‘몸에 감기는 물의 촉감’을 남기었다. 이게 가능한가. 가능했다.섣달그믐이 다가온다. 이맘때면, 뜨끈뜨끈 목욕탕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만 싶어졌다. (사)한국목욕업중앙회 인천광역시지회(이하 협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인천의 목욕장은 209개소다. 최근 10년간 절반 정도가 사라졌다. 온기를 잃었다. 쌓이고 쌓여온 삶의 내밀한 표피가 벗겨지는 것이 안타까워, 동네 목욕탕의 따스함이 느긋이 온전히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지난해 가을 문 닫은 ‘제일사우나’ 남탕‘이태리타월’ 하나로, 삶
2023-02-02 2023년 2월호 -
특집 - 국립세계문자박물관 5월 개관, 정족사고·외규장각을 가다
그 많던 과 왕실 서적은 어디로 갔을까문자와 인쇄술은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뒤바꾼 최고의 발명품이다. 인터넷, 메타버스의 탄생도 제1의 정보혁명인 ‘인쇄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오는 5월 송도국제도시에 문을 연다. 인천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정족사고, 외규장각, 한글 점자를 창안한 도시로 2015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했고, 8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을 보관했던 ‘정족사고’와 왕실 서적을 품었던 ‘외규장각’을 찾아갔다.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정족사고가장 방대한 왕실 서적을 보관했던 장사각(사진좌)과 선원보각 전경 가장 많이 보관하던 사고 - 정족사고“철커덕! 삐이-익”‘정족사고’의 육중한 자물쇠를 풀고 나무 문을 열자 두 채의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들은 옆으로 길게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은 을 보관했던 사고인 ‘장사각’이고, 오른쪽은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이다.장사각의 문을 여니 두 개의 보관함이 눈에 들어온다. ‘법화경판’ 104점을 보관하고 있는 보물함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은 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선원보각은 아예 텅 비어 있는 모습이다. 과 왕실 족보는 어디로 간 것일까.조선은 건국 이후 을 편찬, 춘추관·충주·성주·전주 등 네 곳에 나눠 보관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본만 남는다. 조선은 이러한 연유로 1603년(선조36)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다시 제작해 춘추관, 강화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 다섯 곳에 사고를 세워 보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659년
2023-02-01 2023년 2월호 -
인천의 아침-우리나라 최초 군함 입항 120주년과 국제인 3대
우리나라 최초 군함 입항120주년과 국제인 3대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 초중반 신포동 외환은행 옆 ‘난다방’엔 풍채가 좋은 어르신이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퍼머넌트 웨이브를 한 것 같은 멋진 헤어스타일,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의 주인공은 인천 최초의 외과의사인 한옹 신태범(1912~2001) 박사였다. 의사이면서도 인문학적 교양이 상당히 높았던 신 박사는 기자들이 궁금한 인천의 역사, 문화, 현상에 대해 호탕한 웃음과 함께 명쾌한 답을 내주곤 했다. 다방을 드나들면서 그의 부친이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자 선장 신순성(1878~1944)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신순성 함장이 탄 우리나라 최초 근대 군함이 인천항에 닻을 내린 때는 1903년 4월 15일이다. 고종은 3,000여 톤에 달하는 조선 최초 군함의 이름을 양무호揚武號라 명명한다.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이다. 조선 국방 예산 30%의 거금으로 구입한 양무호는 그러나 군함이라기보다 노후한 화물선에 가까웠다. 1888년 영국 딕슨사가 건조한 화물상선을 1894년 일본 미쓰이(三井) 물산이 사들여 일본-홍콩 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던 배였던 것이다. 일본은 이 배에 구식 함포 4문 정도만 달아 군함이라고 팔아먹었는데, 배가 워낙 낡은 데다 운항 기술도 전수해 주지 않아 신순성 함장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양무호에 대한 비판 속에 조선 조정은 일본에 새로운 군함을 주문, 1904년 12월 20일 1,056톤 급 광제호光濟號를 인도받는다. 광제호는 3인치 포 3문을 장착해 해안 경비와 등대 순시, 세관 감시 등 다목적으로 운용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통신도 바로 이 광제호에서 이뤄졌다.그러나 광제호 운영
2023-02-01 2023년 2월호
- 자료관리담당자
-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