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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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TMI ⑫ 구읍뱃터 물길 따라 역사 산책
우리나라의 인후咽喉에 위치한 인천은 예로부터 해상방위의 요충지였다. 수도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침략자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인천은 온몸으로 적들을 막아내고 쫓아냈다. 지정학적 운명이었다. 적들이 인천 내륙에 도달하기 위해선 중간 기착지인 섬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 자연도(영종도) 역시 그중 하나였다. 멀게는 고려시대부터 가깝게는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영종도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섬’이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 사랑의 향기가 만발하는 영종도를 걸었다.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그래퍼참고 , 1919년 3월 28일, 외딴 섬마을 용유도에서 태극기가 파도처럼 물결쳤다.총도 칼도 없는 우리에게는 태극기가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민족을 살린 그날의 태극기호국의 섬, 태극기 펄럭이다구읍뱃터 근처 영종진공원엔 영종진 성곽과 태평루가 재현돼 있다. 1653년, 조선 효종 때 강화수로 방어를 위해 경기도 남양부에 있던 영종진을 옮겨왔는데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가 그 자리였다. 고종 12년(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양호의 포격으로 파괴될 때까지 영종도는 약 220년 간 왜구들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운양호 사건은 일본이 통상요구를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도발이었다. 왜군은 강화도에 상륙하려했지만 조선군이 초지진에서 포를 쏘며 반격하자 뱃머리를 영종도로 돌려 섬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영종진 수병 35명이 전사하고,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여 정 등 막대한 무기를 강탈해갔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잡아가 승전 축하 잔치도 벌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배상과 수교를 강요한다.
2023-06-01 2023년 6월호 -
인천 미소
보고 싶다 듣고 싶다 ‘시민 목소리’꿀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요즘 꿀벌이 많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에서 꿀벌 관련 기사를 읽고 다시 한번 그 심각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후변화가 이렇게 무섭구나 깨달았습니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일회용품 사용 자제 같은 작은 일부터 꾸준히 실천할 것을 다짐합니다.이현정 미추홀구 수봉로부모님께 사랑과 감사를‘더 인천 : 가족’에서 소개한 어머니와 아버지 기사를 읽으며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25년째 남동구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계시는데, 마치 우리 집 이야기 같았습니다. 내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인 어머니, 든든한 언덕이자 큰 산 같은 아버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강미현 연수구 인천신항대로인천시 홍보대사, 반갑습니다5월호 에 소개된 인천시 홍보대사들의 응원 메시지를 반갑게 읽었습니다. 김광현 선수, 권혁수 방송인 등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인천시 홍보대사라니 정말 기뻤습니다. 이번에는 이분들을 소개하는 기사였다면 다음에는 한 분 한 분 만나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다음 기사도 기다리겠습니다.김혜성 서구 바리미로매달 새로운 배움을나이가 들어도 참 배울 게 많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빨리 변하는 시대에는 더 그렇고요. 을 보면 젊은 사람들 취향도 알게 되고, 새로운 걸 많이 배웁니다. 다만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좋겠습니다. 고령층을 위한 맞춤형 칼럼도 함께 부탁드립니다.어민수 부평구 길주로인천시 미디어인천시 인터넷방송 tv.incheon.go.kr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 enews.incheon.go.kr인천시 SNS검색창에 인천을 입력하
2023-06-01 2023년 6월호 -
시민이 소개하는 우리 동네- 계양산 둘레길
새로운 길에서 다시 처음처럼글 안정남 계양구 주부토로계양산 둘레길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40년 만에 개방된 이 길은 산기슭에 터 잡았던 예비군훈련장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만들어졌다. 아늑하고 편안한 이 길을 나는 자꾸만 걷고 싶다.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두 발을 힘차게 뻗으면 그동안 삶에서 찌든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계양산 연무정에서 장미원까지 이어지는 둘레길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 혼자 산행길에 올랐다. 처음엔 약간 당황도 했다. 야외공연장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등산로 폐쇄’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고, ‘우측 등산로를 이용 바랍니다’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새로운 둘레길은 분명 왼쪽인데 순간 당황했다. 뒤돌아 왔던 길로 내려가 찬찬히 주위를 살피며 다시 걸었다.경인여자대학교 담장을 따라 계양공원사업소 방향으로 올라갔다. 공중화장실을 지나니 튼튼한 멍석이 깔려 있었다. 길은 두 갈래였다. 하느재고개로 향하는 길과 장미원으로 이어지는 새로 난 길이었다.새롭게 펼쳐진 둘레길 멍석 위에 첫발을 내디뎠다. 멍석에서는 거칠고 억센 탄력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총총걸음으로 내려가니 앙증맞은 다리가 10여 미터를 떠받들고 있었다. 투박한 걸음으로 또박또박 소리 내며 다리 위를 걸었다. 견고한 목교木橋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쉼 없이 걷다 보니 예비군훈련장이 떠난 빈자리에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산기슭에서 부는 바람이 차가워 수천 그루의 철쭉나무에는 고작 분홍 꽃 한두 송이만이 피어 있었다. 날이 따뜻해져 모두 활짝 피어나면 더 좋으련만.수십 년의 기다림 끝에 조성된 고즈넉한 둘
2023-06-01 2023년 6월호 -
인천의 아침-우리나라 최초 축구 도시 인천
인천유나이티드 창단 20주년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인천시립박물관 기획특별전 ‘다시, 비상: 인천유나이티드FC 2003-2023’.인천에서 프로축구단 창단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시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다. 월드컵 역대 최고 전적인 4강 열기를 타고 인천시민 구단을 창단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시민주를 구입하면서 레플리카를 선물 받았다. 푸른 바탕에 검은 줄이 쳐진 유니폼을 입고, 마치 국가대표라도 된 양 들떠 새벽마다 동네 공원에서 축구공을 찼던 기억이 새롭다. 동네에서 함께 공을 차던 친구들은 부평고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의 축구 사랑은 거의 남미 축구 팬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일 월드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남일, 이천수 같은 선수가 부평고 출신이고 앞서 노정윤, 이임생, 이근호, 김봉길 선수 등 부평고에선 ‘축구 빅 스타’를 많이 배출한 터였다.인천에선 2003년 우리나라 열세 번째 프로축구단이 탄생한다. 이름하여 ‘인천유나이티드FC’. 인천시민들이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 만든 축구단이었다. 2004년 K리그에 입성한 인천유나이티드는 2005년 K리그 준우승까지 올랐지만 이후 줄곧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단 한차례도 2부 리그로 강등되지 않고 꿋꿋하게 1부 리그에 살아남았다. 오죽하면 ‘생존왕’, ‘잔류왕’이란 별칭까지 얻었을까. 저력의 근저에 ‘우리나라 최초’란 역사가 살아 숨 쉰다.인천은 우리나라에 축구가 처음 시작된 곳이자 최초의 유소년 팀이 탄생한 곳이다. 개항 한 해 전인 1882년 한반도 해역을 측량하던 영국 배 플라잉 피쉬The Flying Fish호가 제물포(인천항)에 정박한다. 오랜 선상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던 영국 선원들
2023-06-01 202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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