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배호 50주기’와 인천 대중음악사
‘배호 50주기’와
인천 대중음악사
인천 대중음악사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연안부두 해양광장에 있는 배호 노래비
대학생이던 1980년대 중반 ‘도화가요제’ 본선에 나갔었다. 인천대학교가 매년 축제 때 개최하는 창작곡 경연대회였는데 대학가에선 제법 유명했다. 친구가 인천대 ‘포크라인’이란 통기타 동아리 회원이었는데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도 참가 기회를 주었으므로 친구와 듀엣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수상권엔 들지 못했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이브레이션 아닌 바이브레이션으로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걸출한 뮤지션을 많이 배출하던 인천은 대학생들까지도 대중음악 분야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통기타와 그룹사운드가 대세였던 1980년대만 해도 인천전문대학 밴드 ‘4막5장’ 보컬이던 이선희가 ‘J에게’란 노래로, 인하대학교 밴드 ‘꼬망스’ 출신 박영미는 ‘이젠 모두 잊고 싶어요’란 노래로 각각 강변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음악 도시 인천’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50년대 이후이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천에 주둔한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중음악은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다. 견인차는 미군을 고객으로 하는 음악 클럽이었다. 부대 안은 물론이고 부대 주변엔 미군을 상대로 라이브 공연을 하는 음악 클럽이 성업을 이루었다.
방송이나 무대가 변변치 않던 시절, 클럽은 가수로 데뷔할 수 있는 좋은 무대였다. 가수의 꿈을 꾸는 많은 사람들이 미8군 무대에 서기 위해 부대 근처에서 합숙을 하며 피나는 연습에 매진했다. 인천 출신 많은 음악인들은 그렇게 미군 클럽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으며 가수로 성장해 나갔다. 송창식은 신포동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팝, 재즈 음악을 따라 부르며 자랐고, 김홍탁은 신포동에 살던 미군으로부터 기타를 배워 훗날 ‘키보이스’를 결성해 ‘한국의 비틀스’란 찬사를 얻었다. 가수이자 말 잘하는 사회자였던 박상규는 ‘조약돌’ ‘친구야 친구’란 노래로 히트를 쳤다. 그는 수인역에서 포장마차, 숭의동 나이트클럽 ‘오인천’, 송도에서 오리고기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부평 방앗간집 아들 형제인 유심초는 ‘사랑이여’란 노래를 국민가요로 만들며 부평 대한극장 건너편에서 ‘그랑프리’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처음 ‘솔개트리오’로 시작해 나중에 ‘소리새’로 이름을 바꾼 한정선·황영익·김광석은 ‘아직도 못다한 사랑’ ‘그대 그리고 나’와 같은 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이다. 예술적 천재성으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한정선은 한동안 부평역 근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 2019년 동인천에 ‘솔트’란 음악 카페를 차렸으나 그해 말 눈을 감고 말았다. ‘내 님의 사랑은’이란 노래를 발표한 ‘따로 또 같이’의 리더인 이주원은 제물포역 근처에서 ‘혼비여비’란 라이브클럽을 운영하며 포크 음악의 맥을 이은 인물이다. 인천대를 다니던 가수 이소라도 이곳을 오가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신포동의 음악 클럽 ‘흐르는 물’은 이주원 사망 10주기인 지난 2019년 4월 ‘고 이주원 10주기 헌정 공연’을 열어 포크 음악 1세대의 예술혼을 추모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부평 신촌 출신인 최성수, ‘순이생각’의 백영규에서부터 구창모, 서울패밀리, 이승재, 신지에 이르기까지 인천 출신 가수들은 차고 넘친다. 연주자들은 훨씬 더 많다.
대중음악사의 앞줄에 배호란 가수가 있었다.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돌아가는 삼각지’ 등 1960년대 스윙재즈 음악으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배호는 톱스타가 되기 전까지 캠프마켓에서 드럼을 치며 음악적 역량을 키운다. 배호 음악의 모태는 인천이었던 것이다. 연안부두에 배호의 흉상과 노래비가 있는 까닭이다. 오는 11월 7일은 배호가 작고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대에 요절했지만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배호의 노래가 잘 어울리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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