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역사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⑪ 인천도호부관아

2021-11-01 2021년 11월호


문학산 아래서

인천 다스리던 관청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2021년 10월 인천도호부관아

인천문학초등학교(미추홀구 매소홀로 553) 교문을 지나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펜스 안에 있는 건축물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이루는 ‘맞배지붕’과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위에 짜임새(공포)를 받친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한 이 건축물은 인천도호부관아(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호)의 일부이다. 인천도호부관아는 말하자면 지금의 시청이다.
인천도호부관아를 언제 건립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전기 문신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인천부승호기>는 1424년(세종 6년) 객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객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지붕의 기와엔 ‘강희 16년’이라고 새겨져 있어 숙종 3년(1677)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불전쟁(병인양요, 1866), 조미전쟁(신미양요, 1871)을 치른 이후 1871년 기록엔 ‘향청 13칸이 무너져 단지 4칸만 남아 있고, 군관청 7칸이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1899년 <인천부읍지>는 그러나 객사 20칸, 동헌 10칸, 내동헌, 어용청, 수미고, 군기고 등 원래의 규모를 밝히고 있어 어느 시점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인천도호부의 건물 대부분은 또다시 불에 타거나 헐리고 객사 일부와 동헌 건물 두 채만 남아 인천문학초등학교를 세울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예를 올리거나 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한 곳이며 동헌은 정무를 보던 건물이다. 2016년 문학초등학교 다목적 강당 보수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옛 인천도호부관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축대의 석렬과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천문학초등학교가 1917년 ‘부천공립보통학교’란 이름으로 시작한 것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다. 일제는 현재의 중·동구 지역만 ‘인천’으로 남기고 나머지 지역과 부평을 통합해 ‘부천’으로 만들었다. 인천도호부관아가 있던 미추홀구 문학동은 부천군에 편입됐고 인천도호부관아 역시 ‘부천군청’으로 사용되다 1917년 부천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일제는 조선 시대 이래 ‘관청’으로 사용한 건물에 대한 조선 왕조 흔적 지우기에 나섰고 이에 객사는 새로 제정한 학교령(1908)에 따라 소학교 교사로, 동헌은 면사무소나 경찰서 등의 건물로 사용했다. 부천공립보통학교는 1922년 일본인 교장의 한인 교사와 학생에 대한 민족 모욕과 차별에 항거, 동맹 휴학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후 인천 부역 확장에 따라 문학동이 다시 인천으로 편입되며 부천공립보통학교는 1937년 ‘문학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인천문학초등학교는 올해 개교 103주년을 맞았다.   
2001년 10월 인천시민의 날,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새로운 ‘인천도호부관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천시가 조선 시대 관아를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을 재현해 건축한 것이다. 1만1,000여m2 부지 위에 420여m2 면적으로 지어진 동헌, 공수 등 7개 건물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하는 중이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