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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차 한잔-박호준 궁시장

2023-08-02 2023년 8월호

 200년, 4대의 혼이 흐르는 화살이여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안영우 포토 저널리스트



화살을 만드는 일은 고되다. 우선 구하기 힘든 재료를 찾기 위해 전국의 산하를 누벼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신우대(가는 대나무), 도피(복숭아나무 껍질)와 같은 재료를 찾아내면 혹독한 노동이 시작된다. 손끝이 갈라지고 허리가 휜다. 늦가을 저녁에 부는 바람처럼 외로운 건 물론이다. 가족 말고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 일을 해야만 한다. 내가 멈춘다면 수천년 간 이어져 온 동이족의 전통이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화살대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는 박호준(79) 궁시장(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난다. 쓰윽 쓰윽.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가 매끈해진다.

“1년에서 3년생의 가는 대나무를 찾아내 1년 정도 말립니다. 말리는 동안 휘어진 대나무는 불로 펴주고 일직선이 될 때까지 다듬어줘야 합니다.”

화살대가 완성되면 화살 양 끝을 제작할 차례다. 화살촉을 꽂고 오늬(줄을 거는 부분)를 만들려면 높은 산 바위 틈에서 자란 참싸리와 복숭아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꿩깃털이 필요하다.

“만드는 건 둘째 치고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재료들이라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다녀야 합니다. 겨우 찾아내면 부르는 게 값이죠. 그래도 제가 아쉬우니 어쩌겠어요. 무조건 사야죠, 허허.”



화살 하나 만드는 데 1년의 시간과 100번의 손길. 이처럼 힘든 궁시장의 길을 열다섯 살 때 시작해야 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할아버지가 조선 말 궁수(활 쏘던 군사)였는데 나중에 화살을 만드셨거든요.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가업을 이었고, 저 역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대나무를 다듬고 하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 됐네요.”

열일곱 살 때 가업을 이은 선친 박상준은 1978년 초대 궁시장이, 그는 2008년 보유자가 되었다.

고양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계양구에 정착해 지금까지 인천에서 살고 있는 ‘인천 사람’이다. 처음부터 궁시장이 되려 했던 건 아니다. 생계를 위해 집안 대대로 해오던 일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조부, 선친께서 먹고살려고 한 일입니다. 열대여섯 살 때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고는 싶어 죽겠는데 대나무 다듬느라 놀지도 못하고, 학교도 못 다녔지요.”

구멍가게로 생계를 보완한 강화도 출신 아내 김가각(77) 씨와의 사이에 낳은 세 아들을 모두 좋은 대학에 보낸 것도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한 문제 틀려올 때마다 다섯 대씩 ‘빠따’를 때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하기도 하네요.”

아내 이름 작명에 대한 사연도 유쾌하다.

“옛날엔 동네 이장이 출생신고를 해줬어요. 아내가 셋째 딸인데 그 아래로는 여아를 낳지 말라는 의미로 장인어른이 이름을 김총각이라 지었는데, 이장이 면사무소에 도착해 이름을 알쏭달쏭 생각하다 그냥 가각으로 신고했다는 겁니다.”

누구도 배우려 하지 않으려는 궁시장의 계보를 잇겠다고 한 큰아들 주동(52) 씨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인천엔 4대를 잇는 ‘궁시장 명가’가 있다.


박호준 궁시장이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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