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트렌드 인천 2023 ⑧ 아름다운 삶의 마침표, 웰다잉
아름다운 삶의 마침표, 웰다잉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2025년 초고령화사회 진입을 앞두고 품위 있는 죽음, 즉 인간답게 죽는 것이 화두로 떠오른 것. 여기에 웰빙(well-being)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웰다잉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며 적극적으로 죽음을 성찰하고 준비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우리 주변의 웰다잉을 둘러싼 풍경을 전한다.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그래퍼
‘사진으로 쓰는 나의 자서전’ 수업 후 기념 촬영
웰다잉의 확산,
좋은 삶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
지난 7월 16일 인천효행장려지원센터의 웰다잉 프로그램 ‘사진으로 쓰는 나의 자서전’ 수업 현장. 백발이 성성한 학생들이 빛바랜 필름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 연필을 들고 또박또박 글을 써내려 간다. 소싯적 이름깨나 날린 얘기, 고단했던 직장 생활, 비행기를 처음 탄 날, 칠순
잔칫날, 항암 치료 끝에 완치 판정받은 날…. 인생 역정歷程을 회고하는 가운데 ‘잘했네’, ‘고생했어’, ‘오늘 행복해’라는 긍정의 언어가 공간을 채운다. 모두의 가슴이 뭉클해진다.
수업을 진행한 이지원(49) 웰다잉 플래너는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게 죽음이다. 천국을 믿는 사람도 빨리 가고 싶진 않을 터. 하지만 죽음은 시와 때가 없다”라며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미리 점검해 삶의 가치를 찾고, 죽음을 건강하게 준비하는 것”이 웰다잉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웰다잉은 죽음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좋은 삶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꽤 흥미롭습니다. 젊을 때 당연하게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런 변화가 재미있습니다.
- 배우 고故 키키 키린
이 플래너는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웰다잉 문화’가 접목되면서 사회적 관심이 부쩍 커졌다”며 “좋은 죽음이 좋은 삶의 완성이란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덧붙였다.
행복한 죽음을 보여주는 드라마나 영화가 늘고 있는 게 그 방증이다. “오늘도 잘 살았다. 돌아보니 세상에 귀한 것 투성이라니. 내 장례식 때는 징징 짜지 말고 즐겁게 놀다 가오. 많이 웃고 노래해 다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는 김감리(김영옥 분) 할머니가 자신이 원하는 장례식을 홍두식(김선호 분)에게 말하며 이별을 준비한다. 영화 ‘서른, 아홉’, TV 예능 ‘뜨겁게 안녕’ 등에서는 사전 장례식이 치러졌다. SNS에 자신의 묘비명, 유언장을 올리는 것도 이젠 자연스럽다. 버킷 리스트, 생전 유품 정리, 장기 기증 등도 웰다잉 문화와 궤를 같이한다.
이지원 웰다잉 플래너와 김영임 씨(왼쪽부터)
김인순 씨의 ‘사진으로 보는 나의 인생노트’
‘기다리는 죽음’에서
‘준비하는 죽음’으로
누구에게나 ‘생生과 사死는 하나다. 죽음은 나이가 많든 적든, 사고든 병이든 누구에게나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깊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시간을 갖고 슬기롭게 웰다잉을 준비해야 한다. 그 첫 단추는 ‘기다리는 죽음’에서 ‘준비하는 죽음’으로 전환해 적극적으로 웰다잉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것.
우리 시는 올해 처음으로 50세 이상 시민을 대상으로 웰빙과 웰다잉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진행한다. 인천성모병원 권역호스피스센터에서 교육을 맡아 건강한 삶을 위한 암 정복·치매 교육·심혈관질환 관리, 마지막까지 나를 지키는 돌봄(호스피스), 인간답게 죽을 권리(사전연명의료의향서), 웰다잉 프로그램(유언장 작성) 등을 알린다. 8월 18일까지 센터 블로그를 통해 접수가 가능하며, 8월 23일부터 9월 20일까지 매주 수요일 5주간 진행된다. 하반기 중 2기, 3기를 모집한다.
교육 담당 장소정(28) 사회복지사는 “시민들 스스로 좋은 삶과 죽음을 준비하려는 인식과 태도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웰다잉을 위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배워가는 것이 교육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 7월 20일 율목도서관에서는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저자 강창래 작가의 강연이 열렸다. ‘떠나는 아내의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부엌 일기’라는 표지글처럼 그는 암 투병 중인 부인을 위해 고통과 아픔 대신 음식으로 만들어낸 짧지만 기뻤던 순간들을 담담하게 전했다.
강의를 들은 강미조(50) 씨는 “내가 원하는 죽음의 풍경을 잠시 상상해 봤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인생의 마지막을 떠올리니 저절로 오늘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집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얘기해 볼 생각”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인천 동구는 지난 3월 올해 첫 취업 특강으로 ‘웰다잉 플래너’ 직업 체험을 실시했다. 동구청 담당자는 “30대 경력 단절 여성부터 60~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큰 관심을 보였다”라고 귀띔했다.
연명의료결정제도
시행 2018년 2월 4일
목적 연명의료에 관한 본인의 의사를 미리 밝혀두고 이를 법적으로 보장해 삶의 존엄한 마무리를 돕기 위한 법(언제나 그 의사를 변경하거나 철회 가능)
등록 기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에서 등록 기관 찾기
법령 정보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에서 법령 정보 및 기록 열람 가능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권역호스피스센터장
‘브라보! 마이 라이프’ 1기 포스터
호스피스·완화의료,
마지막까지 나를 지키는 돌봄
최근 방송인 손지창·오연수 부부가 연명치료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건강보험공단에 찾아가 설명을 듣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해 화제를 모았다.
연명의료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등 치료 효과는 없이 죽음에 이르는 기간만 연장하는 시술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이 이러한 연명의료와 호스피스에 관한 본인 의사를 문서로 밝혀두는 것. 지난 2018년부터 시행됐으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웰다잉법’이라고도 부른다.
연명의료결정제 도입 6년 차,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건수는 2023년 6월 현재 184만 명을 넘어섰다. 삶의 마지막을 중환자실이나 처치실이 아닌 가정이나 호스피스 병동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얘기다.
호스피스는 환자들이 편안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을 말한다. 김대균(51) 인천성모병원 권역호스피스센터장은 “환자의 신체적 통증 조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와 더불어 사회적·심리적 요소도 보살핀다. 이를 위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원봉사자 등이 팀을 이뤄 다각적으로 지원한다”라고 설명했다.
김 센터장은 “연명의료결정법과 호스피스·완화의료가 함께 날갯짓을 해야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다”라고 역설했다. 현재 서비스는 말기 진단을 받은 암환자만 이용할 수 있다. 그마저도 병상 부족으로 암 사망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013년 12.7%에서 2021년 23.2%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웰다잉’은 어려운 일이 될 지도 모릅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 돌봄이 필요한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날 것입니다. 시민과 의료진, 정부의 관심과 적극적 실행이 절실합니다.” 그의 말처럼 죽음의 풍경을 바꾸는 것, 그건 초고령화사회를 맞는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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