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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길 위의 인문학 : 백범광장

2025-04-03 2025년 4월호


김구 선생을 기억하는 이유와 방식 

그리고 되새기는 문화의 힘


글. 김성배 문화비평가


 

1997년 시민모금으로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건립된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신포동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에 건립된 백범과 어머니 동상



김구 선생(1876~1949)은 인천과 인연이 각별하다. 선생은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을 살해했다. 일본 인천영사관의 요구로 인천감리서에 수감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 1898년에 탈옥했다. 그리고 1911년 안명근의 무관학교 설립 운동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 소에 갇혔다가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로 인천항 축항공사장에 동원되어 죽을 고비를 이겨 냈다. 어머니 곽낙원(1859~1939)은 고향을 떠나 감리서 근처 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자식의 옥바라지로 갖은 고생을 했다. 선생은 이런 어머니를 보며,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 고 백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는 말이 진실로 헛말이 아니었다”라고 술회했다.

이런 배경이라면 ‘백범광장’이나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 장수동에서 가좌동을 잇는 ‘백범로’를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백범광장과 백범로는 위치에 따른 역사성이 부족하다. 반면 역사거리는 이런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성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상업지구 내에 있고 친근감을 주려고 

한 실물 크기의 동상이 그렇다.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와 방식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가요, 영화, 드라마 등이 세계 대중문화계에서 놀라운 성공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더 해졌다. 혹자는 이런 일련의 현상을 두고 김구 선생이 그토록 원했던 문화국가를 이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으나 선생이 소망했던 문화국가는 이보다는 더 근본적인 조건을 의미한다. 선생은 최고 문화건설을 다할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할 조짐”이라 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적으로 너무도 힘든 시기를 보내며 선생의 일침을 되새기는 이유다.


인용문 모두 『백범일지』(1947년)에서 따옴. 『백범일지』는 1929년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 형식으로 쓴 상권과 1942년에 임시정부 상황 등을 자세히 밝힌 하권으로 구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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