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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 50년을 돌아온 사람의 길

2020-02-03 2020년 2월호

50년을 돌아온 사람의 길

계양구가 북구이던 1980년대 중반, 서울 갈 때는 삼화고속을 애용했다. 계양구 효성동 집에서 전철을 타러 부평까지 나가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역까지 시간이 걸렸고, 전철 안에선 앉기는커녕 수북이 올라온 콩나물시루 속 덜 자란 콩나물 신세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에 반해 삼화고속은 집에서 가까운 부평공단에서 탈 수 있는데다 소파처럼 편하게 앉아서 오갈 수 있었다. 어쩌다 예쁜 여자라도 옆자리에 앉으면 가슴이 뛰었고, 활주로처럼 쭉 뻗은 경인고속도로를 중후하게 질주하는 버스의 속도감도 괜찮았다. 서울에서 밤늦게 돌아올 때는 애를 먹기도 했다. 과음으로 차멀미를 하거나 화장실이 급해도 도착할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참아야 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던가. 경인고속도로가 점차 기능을 잃어가고 인천지하철, 인천공항철도 개통 등 교통 여건이 좋아지면서 삼화고속은 추억 속의 버스로만 남게 되었다

196812월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는 국방도로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1941년 일제는 조병창이 있던 부평과 인천항 간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국방도로 건설을 추진한다. 3년 안에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상당수의 남성이 징용되며 공사가 지체됐고, 광복을 맞으면서 도로 건설은 중단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효성동, 작전동 일대엔 공사 흔적인 아스팔트 길이 남아 있었는데 그 옆으로 몇 개의 송유관이 지나갔다. 어느 날 누군가 송유관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남자들은 똥지게에, 여인들은 항아리에 기름을 받아냈고 그렇게 보릿고개를 넘어갔다. 국방도로를 확장해 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전까지 도로변 송유관은 생계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 최초란 수식어를 달며 탄생한 경인고속도로가 개통한 이후 인천을 출발하면 18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전까지 국도를 타고 1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였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거나 부평, 주안 공단에서 만든 제품들은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부지런히 서울로 올라갔다. 인천이란 심장은 경인고속도로란 대동맥을 통해 서울로 건강한 피를 공급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는 인천 동서 지역 간 단절을 담보로 한 결과였다. 용현·석남·가좌동 등 인천의 주요 지역은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반으로 갈라졌고 주변은 슬럼·공동화됐으며 소음과 미세먼지가 뿌옇게 인천을 뒤덮었다.

그런 경인고속도로가 인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지난해 말 ‘50년을 돌아온 사람의 길뉴딜 사업을 국토교통부가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으로 승인하면서 경인고속도로로 단절됐던 동서 지역은 반세기 만에 부둥켜안게 되었다. 뉴딜 사업은 가정동~석남역 일원에서 시작한다. 향후 인천대로 주변은 우리 동네 살리기형, 주거지 지원형, 일반 근린형, 중심 시가지형, 경제기반형으로 나눠 권역별 특색에 맞는 도시재생을 진행한다. 경인고속도로가 갈라놓은 동네와 동네가 이어지고 방음벽과 옹벽이 있던 자리엔 맑은 개천이 흐르며, 푸른 공원과 행복한 문화 시설이 들어서면서 을씨년스럽던 마을은 사람들로 북적댈 것이다. 인천은 지금 새로운 도시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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