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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 -부처님은 왜 처음 인천으로 오셨을까

2020-05-03 2020년 5월호

부처님은 왜 처음 인천으로 오셨을까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전등사 대웅보전

“김 기자, 보문사에 팔만대장경 인본 3질이 있었다는 내용 알고 있었소?”
2015년 인천대학교 문헌정보학과 A교수의 전화를 받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강화도가 팔만대장경 판각지였음을 뒷받침하는 새롭고도 구체적 증거가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초조대장경 조조肇造 1000주년이던 2011년 시작한 ‘팔만대장경’ 탐사 취재 욕기가 다시금 전신으로 쫙 퍼졌다. 인천대학교로 달려가 만난 A교수는 ‘보문사에 대장경 인본(인쇄한 책) 3질을 보관했다’는 중국 <사고전서>四庫全書 ‘고려국대장이안기’ 기록을 보여주며 “팔만대장경을 강화도를 중심으로 판각·보관했다는 명백한 사료”라고 말해줬다. 인본은 경판을 보관한 위치와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관례이다. 따라서 대장경판당이 있는 강화도 옆 석모도 보문사에 인본을 보관한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2011년 한 해 동안 합천, 남해, 대구와 강화도를 종횡무진 돌고 돌았다.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1236~1251년 판각한 뒤 150년간 보관했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고, 한문을 잘 아는 사람이 매일 읽어도 30년이 걸린다는 이 불가사의한 8만여 장의 경판이 1398년 합천으로 간 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말이다. 방대한 동아시아 불교 지식과 최첨단 하이테크가 결합해 탄생한 팔만대장경뿐만이 아니었다. 금속활자의 세계 최초(1234) 발명지, 조선 시대 전국 4대 사고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정족사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 등 강화도의 불교·인쇄 문화는 실로 대단했다. 인터넷 혁명에 앞서, 집단지성을 만들며 인류의 문명을 급속히 진전시킨 제1의 정보혁명, 인쇄술의 진앙지가 강화도였던 것이다.


전등사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찰’이란 걸 알게 된 시기도 그즈음이다. 381년 중국의 ‘아도화상’은 강화도로 와 진종사眞宗寺를 창건하며 불교를 전파한다. 전등사傳燈寺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충렬왕의 부인 정화궁주가 원나라 공주에게 빼앗긴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옥등을 시주한 1282년부터이다.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온 병인양요(1866) 때 전등사는 전투 요새로 변신한다. 당시 전등사 스님들과 의병, 전국에서 모여든 범포수들은 정족산에 배수진을 친 뒤 격렬한 전쟁 끝에 외적을 쫓아낸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왕실 서적이 전등사 경내 정족사고에 보관돼 있었으므로 더더욱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1640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한 해 60만여 명이 찾는 국민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635년 창건한 보문사 역시 매년 수십만 명이 다녀가는 명찰이다.


코로나19로 어수선한 가운데 전등사, 보문사를 비롯한 전국의 사찰들이 4월 30일에 돌아온 불기 2564년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5월 30일로 연기했다. ‘코로나19 청정지역’을 유지해 온 강화도와 함께, 인천은 낮은 발병률을 유지하며 선전하는 중이다. 이는 의료진과 공직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높은 시민의식까지 더해지면서 가능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혹시, 아도화상을 굳이 인천 강화도로 보내신 부처님의 자비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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