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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창영초등학교

2020-06-02 2020년 6월호

찬란하고 영화로운 역사

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첫 번째 등굣길은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 ‘창영초등학교’다. 굽이굽이, 찬란하고 영화로운 역사로 빛나는 그 길을 인천시 홍보대사 오유민(영종중학교 2학년) 학생이 따라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 탄생

창성할 ‘창昌’에 영예로울 ‘영榮’. 이름 그대로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교육의 첫발이자 명예로운 역사의 시작점이다. 1883년 개항과 함께 몰려든 외세는 조선인들을 지금의 동구 창영동 일대로 밀어냈다. 이후 1899년 개통된 경인선을 기준으로 마을은 위아래로 갈라졌다. 북촌과 남촌. 당연히 조선인의 몫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던 남촌이었다.
비루한 삶 속,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교육이었다. 남촌 주민들은 학교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07년 학교 문을 열었다. 창영초등학교의 전신前身,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개교 12년 뒤 창영초등학교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서슬 퍼런 대일항쟁기, 학생들은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한다. 곧바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학생들은 교실이 아닌 거리로 나가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는 인천 만세 운동의 시작이자, 독립을 향한 외침이 인천 전역으로 퍼지는 기폭제였다. 교육을 통해 희망을 찾고자 했던 당시 조선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자부심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창영초등학교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가 설치됐다. ‘배다리 쇠뿔고개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김연숙의 시가 선명히 새겨진 비석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역사로 남아 학교를 지키고 있다.
“의미심장한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입니다. 당시 제 또래 학생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움직임을 상상하면 마음이 숙연해져요.”



인천시 홍보대사 오유민 학생이 김미란 교감 선생님과 함께 창영초등학교의 오래된 앨범 속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개교 초창기 창영초등학교 모습(연도 미상, 창영초등학교 제공)


창영의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오유민 학생이 교문으로 들어선다. 모진 세월 다 이겨냈다는 듯,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하나가 운동장을 초연히 내려다보고 있다.
“창영초등학교 구교사校舍입니다. 1922년 지어졌다고 해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잖아요. 이 건물을 새로 세울 때도 인근 주민들이 모금을 통해 공사비를 보탰다고 들었어요.”
아치형 벽체와 무지개를 닮은 현관은 1920~1930년대 학교 건축 양식의 전형이다. 데칼코마니처럼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건물의 모습이 단정하다. 지붕 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이 건물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삐걱삐걱. 조심스레 옮기는 발걸음에도 낡은 마룻바닥은 아파한다. 세월에 장사 없는 건 건물도 마찬가지. 이곳은 20여 년 전부터 학교의 기능을 잃었다. 대신 ‘창영문화재관’이라는 새 임무를 부여받았다. 2015년 리모델링한 창영의 심장에는 학교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담긴 소중한 자료와 유물이 보관·전시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복도를 일一자 형태로 기다랗게 하고 커다란 창문을 뚫은 건 조선인들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해요. 시린 역사의 흔적이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준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지난했던 과거를 고스란히 품은 낡은 교사校舍. 그 뒤편으로 호위받듯 아늑하게 자리한 신관 건물의 모습이 평화롭다.


창영문화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교사校舍. 1922년 지어진 이곳은 창영초등학교의 찬란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역사만큼 찬란할 미래

학교를 한 바퀴 휘돌던 오유민 학생이 무언가 허전함을 느낀다. 창영초등학교의 상징 중 하나인 고故 강재구 소령 흉상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다행히 보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만큼 ‘창영인’들의 면면도 무척 화려하다 들었어요.”
41회 졸업생인 강재구 소령은 1960년 육군 소위로 임관 후 훈련 중 병사가 실수로 떨어트린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쳐 많은 대원들의 생명을 구하고 전사했다. 일제 식민 사관에 맞서 한국 미술사의 토대를 마련한 우현 고유섭, 비운의 조각가 조규봉, 인천을 대표하는 언론인 고일,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이경성 등도 창영의 이름을 빛낸 보석이다.
시곗바늘을 빠르게 돌려 오늘날로 돌아오면 익숙한 이름과 마주한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인정받는 한국 최고의 투수 ‘류현진’이다. 창영초등학교는 구도球都 인천을 있게 한 야구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제2의 류현진을 꿈꾸는 아이들의 힘찬 함성이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인천을 넘어 전국구 대회에서도 매년 탁월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야구 명문으로서의 역사도 함께 써 내려가고 있는 인천의 자랑입니다.”
인천 교육의 살아 있는 역사 창영초등학교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천시교육청이 지정한 ‘행복배움학교’로, 교육 여건 개선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인프라 확충과 교직원들의 노력을 통해 학생들의 꿈을 위한 도전을 지원하고 있는 창영초등학교의 미래는 역사만큼 찬란하리라.


인천창영초등학교
인천광역시 동구 우각로15번길 16

주요 연혁
1907. 05. 06 : 인천보통공립학교로 개교
1910. 03. 26 : 1회 졸업식 거행(18명)
1992. 12. 16 : 구교사校舍 인천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 지정
1996. 03. 01 : 인천창영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2. 11. 30 :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 육군소령 강재구 상 현충 시설 지정
2015. 10 : 제15회 전국박찬호기초등학교 야구대회 지역 예선 우승
2017~2020 : 행복배움학교(준비교) 선정 및 운영



구도球都 인천을 만든 인재의 산실, 창영초등학교 야구부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시작점이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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