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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8·15광복 75주년

2020-07-31 2020년 7월호

8·15광복 75주년  인천, 태극기 휘날리며


인천시가 지난해 광복절을 기념해 디자인한 태극기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를 찾아낸 건 2013년이다. 대개의 특종이 그렇듯,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제보자는 서울세관 공무원이었다. 그는 누렇게 빛바랜 고지도를 보여주며 ‘D39’란 필지 번호를 가리켰다. 번호 옆에 ‘稅務司公館’세무사공관이란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는 ‘인천해관장 관사터’라고만 알려졌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정확히 어딘지 기록을 못 찾아 화도진이다, 올림포스호텔이다 등 수십 년 동안 의견이 분분하던 터였다. 그런데 자유공원 입구인 ‘중구 북성동3가 8-3’(현 리움웨딩홀)이 조약 체결 장소란 사실이 고지도의 발견으로 밝혀진 것이다.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진실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특종 보도는 방송, 신문 등 여러 타 매체로 확산되었고 사학계의 중요 의제로도 설정됐다. 수년 뒤 전문가들의 논의와 면밀한 연구를 거친 끝에 ‘D39’ 자리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로 비정되었다. 후속 취재 보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인천 태극기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던 1882년(고종 19) 5월 22일 전까지 우리나라엔 정식 국기國旗가 없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둔 1882년 5월 14일,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조선의 국기를 만들어 조인식에 사용해 달라”고 요청한다.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고, 이응준은 슈펠트가 타고 온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호에 머물며 조약 체결 8일 전 제작을 시작해 22일 완성한다. 우리나라 최초 태극기의 창안이었다. 이 태극기는 5월 22일 인천 앞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제물포 언덕에서 진행한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함께 나란히 게양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882년 9월 25일, 박영효는 일본 시찰을 떠나던 메이지마루明治丸 배 안에서 이응준의 태극기를 모본으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제작해 일본 방문 때 사용한다. 이듬해인 1883년 3월 6일 고종임금은 박영효의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공포한다. 그러나 국기 제작 방법을 명시하지 않아 이후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2년 ‘국기통일양식’을 제정·공포하면서 지금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침해하고 미국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 종결과 함께 개화파·위정척사파의 대립 구도가 깨지며 근대국가로의 첫발을 내디딘 측면이 있긴 하다. 이 조약은 이후 조영(1883), 조독(1883), 조이(1884) 수호통상조약 등 서구 열강과 잇따라 맺은 조약의 준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개항기 서구 열강의 공략을 감당하기 위해 제작했던 태극기는 3·1운동의 물결로 흘렀고, 일제강점기 의사義士·열사烈士들이 가슴에 품고 다니며 거사를 치를 때 꺼내어 본 독립운동의 표상이었다. 21세기의 태극기는 K-방역, K-스포츠, K-팝 등 대한민국의 높은 국격을 연상시키는 상징물이자 국민적 자부심이 되었다. 8·15광복 75주년, 인천의 역사와 혼이 새겨진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인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장소인 현 ‘리움웨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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